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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조원동에 터 잡은 '여주 이씨 집성촌' 이야기
수원시 향토유적 제22호 학사 이고(李皐, 1338~1420) 묘역 관리자 이기덕 씨
2023-08-29 16:14:08최종 업데이트 : 2023-08-30 14:08:26 작성자 : 시민기자   곽노마

수원 광교산에서 농사지으며 8년째 여주 이 씨 재단 시제 및 묘를 관리하는 이기덕 씨 

수원 광교산에서 농사지으며 8년째 여주 이씨 재단 시제 및 묘를 관리하는 이기덕 씨 


수원 조원동에는 여주 이씨(驪州 李氏)가 사는 집성촌이 있다. 여주 이씨(驪州 李氏)는 경기도 여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명문 성씨이다. 집성촌(集姓村)은 같은 성씨의 씨족이 모여 사는 마을을 말하는데 마을 단위로 모여 살지는 않아도 특정한 좁은 범위의 지역에 여러 친척이 모여 살아서 사실상 집성촌이나 다름없는 형태인 것도 있다. 집성촌은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이 같은 부계 혈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조상에게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고 벌초 같은 일도 함께하는 문화가 있다.

 

▲음력 10월1일이 되면 여주이씨 재단(여주이씨 본적) 시제를 지낸다.

음력 10월 1일이 되면 여주 이씨 재단(여주 이씨 본적) 시제를 지낸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농업이 국정의 기조를 이루어 왔으므로, 농산물에 관계되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조원동에는 대추나무가 많았기에 대추원, 조원 말 또는 조원, 주원 말, 주안 골, 주원, 주안 말 등으로 불렸다. '주원' 또는 '주안'으로 불리는 것은 아마도 '조원'이라는 말이 변화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여주 이씨(驪州 李氏)의 역사 이야기 – 학사 이고(李皐, 1338~1420) 선생

수원 조원동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여주 이씨(驪州 李氏)의 역사 이야기가 있다. 이 역사 이야기에서는 유명한 학사 이고(李皐, 1338~1420)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1899년 편찬된 수원군읍지 고적(古蹟)편의 팔달산 내용에 따르면 이고 선생은 본관이 여주인 사람으로 관직이 집현전 제학에 이른 분이다.

학사 이고 선생은 고려 말 어지러운 정치에서 물러나 광교산 남쪽 기슭 탑산에서 살았다. 그러던 중 공양왕이 이고 선생에게 사람을 보내 즐거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집 뒤로 조그마한 산이 들 가운데 있어 사통팔달하는지라 올라가 사면으로 바라보아도 가림이 없으니 이것이 가장 즐겁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여기서 '탑산'이란 다른 어느 산과도 연결되지 않고 홀로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마치 평평한 땅에 탑을 세워 놓은 것과 같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이 시대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 이고 선생을 존경하여 여러 번이고 벼슬을 권했지만 이고 선생은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이에 태조 이성계는 화공을 시켜 이고 선생이 살고 있는 '탑산'을 그려 오라고 명했고, 화공이 그려온 그림을 본 이성계는 '역시 아름답고, 사통팔달한 산'이라 크게 감탄하고 산 이름을 팔달산(八達山)이라고 명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은행나무앞 시제는 권선구청에서 관리한다

 뒷산으로 여주 이씨 3분 묘, 그리고 자손들 묘 (참판벼슬, 학사벼슬 등) 제사를 관리하고 있다.
 

수원의 명소인 팔달산과 망천(수원천)을 비롯하여 이고 선생이 사용하던 우물과 낚시터 및 권선리 등은 이고 선생과 관련된 지명이다. 권선리에서 심었던 은행나무는 현재 시제를 지내는 사용되고 있으며, 권선구청에서 관리하는 대상이다.
 

▲은행나무앞 시제 모습

은행나무 앞 시제 모습
 

이고 선생의 가르침은 후대의 교육기관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바로 1970년대 개교한 '수원공업고등학교'가 바로 그 중심에 있다. 팔달산 자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수원공고는 이고 선생의 후손인 여주 이씨(驪州 李氏) 문중에서 설립된 학교로, 현재는 여주 이씨(驪州 李氏)를 관리하는 재단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지난 주 필자는 여주 이씨(驪州 李氏)의 집성촌 토박이 이기덕 씨 인터뷰 진행하기 위해 광교산으로 향했다. 당시 정조가 치제문을 직접 써서 치제한 현재 광교산(장안구 하광교동 산 51-1)에 있는 이고 묘역은 광교저수지 상류, 영동고속도로가 가로지르는 도로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된다.

이곳에는 여주 이씨 집성촌으로 사유지를 표기한 팻말이 놓여 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수원 광교산에서 농사를 지으며 8년째 여주 이씨 재단 시제, 묘 관리를 하는 1955년생으로 수원 조원동에서 태어난 이기덕 씨는 여주 이씨 집성촌의 토박이이다.

 

Q. 1950년~1970년대 생활상에 대해 이야기 해주세요.

A. "1955년에 태어났어요. 당시 6.25 전쟁이 끝난 시점이었는데, 그때는 진짜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라 사람들은 다 농사를 짓고 살았죠. 50년도 조원동 집성촌에는 여주 이씨 25가구가 있었는데, 여주 이씨 딸들이 결혼해서 타지로 나갔다가 친정집이 그리워서 조원동으로 다시 이사를 오게 되면서 다른 성들도 같이 살게 되었죠. 조씨, 신씨, 박씨, 최씨 등 4가구가 자리를 잡게 되었어요. 그리고 1960년 그 당시는 몇 가구 빼고 부유하게 살고 거의 모두 힘들게 살았던 시절이라 동네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들기에 조금 잘 사는 부잣집에서 일 년에 한 번 조원동 뒷산에 가을 고사(굿)를 지냈어요. 워낙 뒷산이 산신이 엄해서 음식을 올렸어요. 제사를 지내면 부잣집도 좋아지고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줘서 서로 좋은 거 아니겠나요?"

 

Q.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농사를 짓고 사셨다고 하셨는데, 땅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A. "우리는 가난한지라 땅을 소유하고 있지는 못했고, 저기 서울 사람들이 다 땅을 가지고 있었던지라. 우리는 서울 사람들이 빌려준 땅에서 농사를 짓고, 어쩔 수 없이 생산한 쌀의 절반을 주었어요. 그러다가 60년대였나, 그때 박정희 정부가 땅을 농사짓는 사람 소유로 하고 그 땅값을 농사지어서 갚는 걸로 바뀌어서 아마 1년에 얼마씩 갚으면 자기 땅이 되는 구조였죠. 그게 바로 60년대 토지 구획 정리라는 것이죠. 그때부터 땅 없던 사람들이 다 내 땅이 되면서 절세 부자가 된 것이지."
 

Q. 그 당시 여주 이씨 집성촌에서의 명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A. "여주 이씨 집성촌에서는 잘 사는 집에서 떡국을 끓여서 나눠주는 정이 있었어요. 서로서로 도와주는 분위기였죠. 그래서 비교적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해 제사음식은 부자, 가난한 사람 비교해서 나눠 줬어요. 명절에는 큰 집에서 작은 집 순으로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냈는데 사람들이 많아서 오후 늦게까지 돌아다니며 집성촌의 모든 어르신에게 절을 하러 다녔죠. 부잣집에서는 마당에 멍석 깔아놓고 국수, 떡 차려놓고 같이 모여서 먹고 놀고, 설날에는 윷놀이, 자치기, 땅따먹기도 하고 놀곤 했죠."

 

Q. "마을 이름이 여러 가지로 표현되었던데, 기억나시는 것 있나요?"

A. "옛날에는 조원동을 '주안말'이라고 했어요. '주안말'을 지나면 '마공구리'(집 3채)라는 마을과 용씨 집성촌 솔대라는 곳이 있었죠. 그 외에도 돌미, 주안말, 금당골이었는데, 솔대에는 방직공장, 정미소, 택배회사, 담배 가게가 있어서 살 형편이 되는 부자가 상대적으로 많곤 했지요. 그리고 '돌미'라는 마을은 동쪽 산과 서쪽의 갈리봉, 그리고 북쪽으로 삼림욕장까지 연결된 낮은 산줄기 등을 경계로 한 작은 마을이었죠. 돌미 마을은 윗마을(윗돌미)과 아랫마을(아랫돌미)로 구분되어 약 20여 세대가 살고 있었어요. 윗마을에는 여주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고, 아랫마을에는 광주 이씨 일가가 집성촌을 이루곤 했어요."
 

Q. 8년째 여주 이씨 재단 시제 및 묘 관리를 맡고 계시는데 자세한 이야기 들려주세요.

A. "집안에 시제 관리하는 분이 계셨는데 건강이 안 좋아져 8년 전 부터 제가 맡고 있어요. 음력 10월 1일이 되면 여주 이씨 재단(여주 이씨 본적) 시제를 지냅니다. 뒷산으로 여주 이씨 3분 묘, 그리고 자손들 묘 (참판벼슬, 학사벼슬 등) 제사를 관리하고 있어요. 그날은 전국에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제주도 등 모든 지역에서 여주 이씨 자손들이 다 모입니다. 약 100명 정도 돼요. 제사비는 종중(여주 이씨를 관리하는 재단 '수원공업고등학교')에서 부담하고 제가 직접 제사를 준비합니다.

인부를 불러서 대추, 밤, 감, 인절미(녹두곡물), 고기, 전, 닭, 식혜 등 제사 음식을 준비해요. 그리고 옛날에 이고 선생이 권선동 집 앞에 심은 은행나무가 약 500년이 되었어요. 현재 은행나무는 권선구청에서 복원 관리하고 있습니다.
 

은행나무 앞 시제는 권선구청에서 날짜를 정해주면 준비를 해요. 수원시 의원들, 국회 의원들, 권선구청장 등이 참석합니다. 남사에는 2,000평 산소가 있는데 음력 10월 2일에 시제를 지내요. 참석하는 분들은 40~50명이 됩니다. 조원동 뒷산 시제는 음력 10월 3일 여주 이씨 자손들이 참석해서 시제를 지내요. 그리고 함안, 여주, 병천 등 다른 지방에서도 소규모로 시제를 지냅니다. 옛날 벼슬 정3품 벼슬한 분들 자손들 제사를 지내요."
 

인터뷰를 마치고 뒷산으로 보이는 여주 이씨 3분 묘, 그리고 자손들 묘 (참판벼슬, 학사벼슬 등) 를 둘러보고 내려왔다.  마을 이야기 여주 이씨(驪州 李氏)의 집성촌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조용하지만 기풍이 서린 곳이었다.

 여주 이 씨(驪州 李氏) 시제

여주 이씨(驪州 李氏) 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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