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남헌 낙남헌 "내가 좀 무식해서 그러는데 낙남헌이 무슨 뜻이기에 그렇다는 거요?" "낙남헌이라는 말은 중국 후한(後漢)시대 수도인 낙양성(洛陽城)의 남궁(南宮)에서 따온 겁니다. '낙(洛)'자는 낙양을 의미하지요. 원래 후한의 수도는 장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왕망(王莽)의 난'이 일어나서 폐허가 되어 버렸지요. 그래서 광무제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긴 뒤부터 후한의 국운이 활짝 피었습니다. 즉, 전하께서는 수원에서 우리 수원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여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만! 그렇다면 장안이 한양이고, 낙양이 수원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한양이 아니라 수원이 대세다, 이런 뜻이오?" "허허, 그렇게 큰소리로 말씀하시면 전하께옵서 위험해지지요. 안 그래도 한양에 근거를 둔 노론 양반들이 쌍심지를 켜고 전하를 노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걱정 마쇼. 전하는 우리 수원 장정들이 지킬 테니까! 철통 같이!" 드디어 아침 7시. 정조의 신호로 낙남헌 마당에서 문과와 무과 별시가 열렸다. 정조는 시제로 '근상천천세수부(謹上千千歲壽賦)'를 내렸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는 부(賦)를 지으라는 것. 이날의 별시에서는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이 급제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후, 정조는 수원에 파격적인 특혜를 주었다. 해마다 수원사람들만을 위한 과거시험을 열었던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과거는 공정하게 치르기가 쉽지 않았다. 문장을 평가하는 것은 아무래도 주관적 견해가 개입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니 이미 조정의 요직을 선점한 명문거족의 입김이 셀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선의 과거 급제자는 대다수 노론 명문가에서만 배출되었고 향리의 인재들은 출사길이 막혀 버렸다. 수원을 한양에 버금가는 수도로 키우려 했던 정조는 수원의 인재들을 위해 파격적인 은혜를 베풀었다. 3년마다 열리는 식년시와는 별도로 수원에서는 매년 과거시험을 보아 문과와 무과 급제자들을 뽑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수원 사람들의 자부심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정조와 뜻을 같이하는 개혁세력을 키우는 방편이기도 했다. 득중정 "아아, 오늘도 식은땀깨나 흘리겠구먼." 득중정 사실 정조는 안경이 없이는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나빴다. 그런 그가 뛰어난 활 실력을 갖추게 된 데에는 서글픈 사연이 있다. 사도세자가 비극적으로 죽은 후, 이산 역시 위험한 처지에 몰렸다. 사도세자가 역모죄로 죽었으므로 역적의 아들인 이산 역시 보위에 오를 수 없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결국 영조는 손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산은 요절한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고 심지어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노론과 김상로'라는 내용을 담은 금등까지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산의 즉위를 막으려는 노론의 집념은 대단해서 여러 차례 자객을 넣었다. 더욱이 세손을 모시는 내관들과 궁녀들조차 노론에 포섭되어 암살 작전에 동조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 이산은 스스로 무예를 닦아 자신을 보호하는 수밖에 없었다. 훗날 그는 세손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때에 나는 옷 띠도 끄르지 못하고 밤을 지낸 날만 해도 몇 날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외롭고 위태로움이 어떠했으며 나라의 형편은 얼마나 간고했겠는가. 실로 아슬아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 외가가 개입된 여러 차례의 암살 위기를 겪으면서도 끝내 보위에 올라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끈 개혁군주 정조. 득중정은 과녁을 겨누듯 개혁의 꿈에 집중했던 정조의 집념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