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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과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정조
낙남헌과 득중정
2012-01-27 15:49:04최종 업데이트 : 2012-01-27 15:49:04 작성자 :   e수원뉴스

낙남헌

봉수당에서 혜경궁의 진찬연이 열린 다음날 새벽.
화성행궁 낙남헌(洛南軒)으로 헌헌장부들이 모여들었다. 
낡은 도포일망정 곱게 다려 입고 괴나리봇짐을 진 선비들, 장대한 기골에 형형한 눈빛으로 칼과 창, 화살을 찬 장정들..... 모두 수원과 그 인근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수원과 인근 지역 인재들을 대상으로 별시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낙남헌(洛南軒)'이라는 이 이름 속에 전하의 심오한 뜻이 들어 있군요."
젊은 선비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한눈에 보기에도 무과시험을 보러 온 것 같은 기골이 장대한 장정이 눈썹을 꿈틀대며 묻는다.

수원과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정조_1
낙남헌

"내가 좀 무식해서 그러는데 낙남헌이 무슨 뜻이기에 그렇다는 거요?"
"낙남헌이라는 말은 중국 후한(後漢)시대 수도인 낙양성(洛陽城)의 남궁(南宮)에서 따온 겁니다. '낙(洛)'자는 낙양을 의미하지요. 원래 후한의 수도는 장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왕망(王莽)의 난'이 일어나서 폐허가 되어 버렸지요. 그래서 광무제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긴 뒤부터 후한의 국운이 활짝 피었습니다. 즉, 전하께서는 수원에서 우리 수원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여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만! 그렇다면 장안이 한양이고, 낙양이 수원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한양이 아니라 수원이 대세다, 이런 뜻이오?"
"허허, 그렇게 큰소리로 말씀하시면 전하께옵서 위험해지지요. 안 그래도 한양에 근거를 둔 노론 양반들이 쌍심지를 켜고 전하를 노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걱정 마쇼. 전하는 우리 수원 장정들이 지킬 테니까! 철통 같이!"

드디어 아침 7시. 정조의 신호로 낙남헌 마당에서 문과와 무과 별시가 열렸다.
정조는 시제로 '근상천천세수부(謹上千千歲壽賦)'를 내렸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는 부(賦)를 지으라는 것. 이날의 별시에서는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이 급제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후, 정조는 수원에 파격적인 특혜를 주었다. 해마다 수원사람들만을 위한 과거시험을 열었던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과거는 공정하게 치르기가 쉽지 않았다. 문장을 평가하는 것은 아무래도 주관적 견해가 개입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니 이미 조정의 요직을 선점한 명문거족의 입김이 셀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선의 과거 급제자는 대다수 노론 명문가에서만 배출되었고 향리의 인재들은 출사길이 막혀 버렸다.

수원을 한양에 버금가는 수도로 키우려 했던 정조는 수원의 인재들을 위해 파격적인 은혜를 베풀었다. 3년마다 열리는 식년시와는 별도로 수원에서는 매년 과거시험을 보아 문과와 무과 급제자들을 뽑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수원 사람들의 자부심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정조와 뜻을 같이하는 개혁세력을 키우는 방편이기도 했다. 

득중정

"아아, 오늘도 식은땀깨나 흘리겠구먼."
1790년 어느 여름날 아침.
활을 멘 무인들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화성행궁으로 들어섰다.

"전하께서 이리 자주 수원에 행차해 주시는 게 성은이 망극한 일인데, 어휴, 막상 전하가 활을 들고 계시는 모습만 보면 입술이 바작바작 탄다니까."
"누가 아니라나? 신궁이셔, 신궁. 쏘는 족족 백발백중!"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닮아 무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특히 활쏘기는 '신궁(神弓)'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뛰어났다. 

화성행궁 활터 정자에는 벌써부터 수원의 무인들은 물론 정조를 따라 내려온 한양의 문관들과 무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만 오면 반드시 저곳 정자에서 문무백관들을 모아놓고 활쏘기 시합을 열었다.

"수원 무인들의 실력이 나날이 향상되고 있어서 과인이 몹시 기쁘오. 자, 그럼 부족하나마 나도 몇 시위 당겨 보겠소."
정조가 활을 들자 다들 침을 꼴깍 삼키고 주시했다.
'팅'
시위를 떠난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명중이오!"

'팅'
그 다음 화살이 뒤를 이어 날아가더니 처음 꽂힌 화살 바로 옆에 정확히 꽂힌다.
"명중이오!"

그 뒤로도 두 발을 더 쏘았는데 모두 명중이었다. 4발을 쏘아 4발 모두 명중!
그나마 4발로 그쳐 준 것이 고마울 정도였다. 한 번은 허공에 부채를 걸어놓고 10발을 쏘기로 했는데 그중 아홉 발을 모두 명중시켜 무관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놓았다. 그렇다면 한 발은 빗나간 걸까? 

"꽉 채우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니 한 발은 버리겠소."
정조는 느긋하게 한 마디 하고는 마지막 남은 한 발을 쏘지 않았다. 그나마 무관들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한 배려였다. 

4발을 쏘아 4발을 모두 명중시킨 날, 정조는 이 활터 정자에 이름을 지어 주었다.
"새는 양쪽의 날개를 모두 움직여야 날 수 있는 법. 모름지기 진정한 선비라면 문무를 겸비해야 하오. '예기(禮記)' 46권 '사의(射儀)'편에 이런 구절이 있소.  '활을 쏘아 맞추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得卽爲諸侯, 射不中得不爲諸侯)'! 이 문장에서 '득(得)'자와 '중(中)'자를 떼어 이 정자의 이름을 '득중정(得中亭)'이라 하겠소."
내친 김에 그는 손수 편액까지 써서 걸어 주었다. 

수원과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정조_2
득중정

사실 정조는 안경이 없이는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나빴다. 그런 그가 뛰어난 활 실력을 갖추게 된 데에는 서글픈 사연이 있다. 
사도세자가 비극적으로 죽은 후, 이산 역시 위험한 처지에 몰렸다. 사도세자가 역모죄로 죽었으므로 역적의 아들인 이산 역시 보위에 오를 수 없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결국 영조는 손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산은 요절한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고 심지어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노론과 김상로'라는 내용을 담은 금등까지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산의 즉위를 막으려는 노론의 집념은 대단해서 여러 차례 자객을 넣었다. 더욱이 세손을 모시는 내관들과 궁녀들조차 노론에 포섭되어 암살 작전에 동조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 이산은 스스로 무예를 닦아 자신을 보호하는 수밖에 없었다.  

훗날 그는 세손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때에 나는 옷 띠도 끄르지 못하고 밤을 지낸 날만 해도 몇 날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외롭고 위태로움이 어떠했으며 나라의 형편은 얼마나 간고했겠는가.   실로 아슬아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 외가가 개입된 여러 차례의 암살 위기를 겪으면서도 끝내 보위에 올라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끈 개혁군주 정조. 득중정은 과녁을 겨누듯 개혁의 꿈에 집중했던 정조의 집념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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