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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에 새 국가체제 세우려던 정조
노래당과 화령전
2012-02-03 15:22:09최종 업데이트 : 2012-02-03 15:22:09 작성자 :   e수원뉴스

노래당

연이어지는 불꽃 소리와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수원 하늘을 가득 채운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는 밤 행사였다. 집집마다 등을 걸어 밤이 대낮보다 더 밝은 가운데 사람들은 밤새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었다.
정조는 노래당(老來堂)에 앉아 하늘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래당은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열리는 행사 사이사이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수원화성에 새 국가체제 세우려던 정조_1
수원화성에 새 국가체제 세우려던 정조_1

'노래당'이라는 이름은 백거이(白居易)의 시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거처하면 그곳이 고향이다(老來又委命 安處卽爲鄕)'에서 '노래(老來)'를 따 와서 지은 것이다. 정조는 새삼스럽게 노래당 편액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채제공의 글씨였다. 
"과인은 채공의 글씨가 참 좋소."
아까부터 정조 옆에 앉아 함께 불꽃을 바라보던 영의정 채제공이 쑥스럽게 웃었다.  그는 현재 정조가 정치생명을 걸고 진행하는 화성 축성사업의 총책임자를 맡고 있었다. 그만큼 정조가 아버지처럼 믿고 의지하는 최고의 충신이었다.

오래 전 영조가 노론에게 속아 사도세자를 폐위하려고 했을 때에도 채제공만은 당파를 떠나 사도세자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훗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을 때도 유일하게 목숨 걸고 구명운동을 펼쳤다. 
당시 어린 세손이었던 이산은 이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영조 역시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세손에게 말했다. 
"세손! 잊지 마라. 노론의 거두 김상로가 네 아버지를 죽인 장본인이다. 그리고 너에게 충성을 바칠 신하는 채제공뿐이다."

이산은 영조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왕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채제공을 불러 들였던 것이다. 채제공은 정조가 마음을 열고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살아 계셨다면...."
문득 던지는 정조의 한 마디에 채제공은 가슴이 미어졌다.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었기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동갑이었다. 그러니 오늘 정조가 혜경궁에게 올린 진찬연은 사실상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올리는 것이기도 했다. 

채제공은 아까 봉수당에서 진찬연을 끝낸 뒤 정조가 한 말을 기억했다.
"오늘의 의식은 실로 천 년 만에 처음 있는 경사이다. 오는 갑자년(1804년)에는 자궁께서 칠순이 되신다. 그때도 현륭원에 참배하고 잔치하길 오늘처럼 할 것이다. 오늘 사용한 반탁(盤卓)과 존작(尊爵)의 도구들을 화성부에 보관했다 10년 후 경사가 거듭 돌아옴을 기다리게 하라."

채제공은 정조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10년 후면 지금의 세자가 15세가 되므로 친정(親政)을 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정조는 세자에게 양위를 하고 이곳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체제를 세우려 하는 것이다. 임금과 백성이 직접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대동세상을! 

"전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10년 후에 이곳에서 다시 큰 잔치를 여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채제공의 말에 정조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 되어야지. 10년 뒤에도 그대와 나, 이렇게 노래당에 앉아 함께 불꽃놀이를 봄세."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채제공은 목이 메어왔다. 이렇게 총명하고 따뜻한 성군을 섬긴다는 것이, 이런 성군의 신임을 받는다는 것이 더없이 기쁘고 행복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채제공이 1799년, 일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바로 그 다음해인 1800년 6월, 정조 역시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갑자년을 꼭 4년 앞둔 시점이었다. 
채제공이 썼다던 노래당 편액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노래당을 거닐며 수원 하늘을 바라보면, 오래 전 이곳에서 같은 꿈을 꾸던 지혜로운 군주와 충직한 신하의 대화가 나직이 들려올 것만 같다.

화령전

1800년 6월 28일.
조선 전체가 울음으로 뒤덮였다. 22대 임금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한 것이다.
젊고 건강한 임금이 며칠간 종기를 앓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특히나 정조는 죽어 가면서 수수께끼 같은 한 마디를 남겼다. 

"수정전!"
수정전은 노론의 비호세력으로 평생 정조를 괴롭혀 온 정적(政敵) 정순왕후의 거처였다. 정조가 투병하는 동안 한 번도 문병을 오지 않던 정순왕후는 그날 갑자기 찾아와 사관과 의관마저 물리친 뒤 정조와 단 둘이 남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뛰어나오며 정조의 승하를 알렸다. 사람들은 정조가 마지막으로 외친 '수정전'이라는 그 말이 곧 자신이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노론에 의해 죽었음을 알린 것이라 믿었다. 

그 해 6월, 정조의 뒤를 이어 11살의 나이에 보위에 오른 아들 순조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린 나이지만 그는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하게 국정을 수행해 왔는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린 미래가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노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알았다.

1년 후, 순조는 화성행궁 옆에 전각을 하나 지었다. 아버지 정조의 어진을 모시는 봉안각이었다. 전각의 이름은 화령전(華寧殿). 화(華)는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했던 화성(華城)에서 따 왔고 령(寧)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는 구절에서 따 왔다.

수원화성에 새 국가체제 세우려던 정조_2
수원화성에 새 국가체제 세우려던 정조_2

아버지가 생전에 얼마나 수원을 사랑하고 사도세자를 그리워했는지 기억하는 순조는 어진을 화성행궁 근처에 모셔놓아 고인의 혼백이나마 마음껏 수원을 돌아보고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화령전에 들러 아버지의 어진을 바라보았다. 어진 속의 정조는 용포 대신 융복을 입고 있다. 문무를 겸비한 정조는 늘 군주가 힘을 가져야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해진다고 말했다. 그래서 강인한 무관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융복차림으로 공식행사에 서는 일이 많았다. 순조가 굳이 아버지의 어진에 융복차림을 고집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순조와 정조는 똑같이 11세 때 부친의 죽음을 겪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노론의 손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또한 순조 역시 어린 시절의 정조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가 이루고자 한 꿈을 이루겠다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래서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긴 것처럼,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어진을 수원에 모셨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닮으려 한 것처럼 순조 역시 아버지 정조를 닮고자 했다. 

"아바마마께서 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왕과 백성이 직접 소통하는 대동세상을 제 손으로 만들겠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바마마께서 못 다 이루신 꿈을 제가 꼭 이루겠습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조를 죽인 주범으로 의심받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나라는 온전히 노론벽파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러나 1803년부터 친정을 실시하면서 노론벽파를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하급관리를 육성하고 국왕 친위부대를 증강하면서 국왕의 권한을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 했다.

정조가 그랬던 것처럼 순조 역시 한평생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려 애썼다. 그러나 노론의 뿌리는 너무나 견고했다. 게다가 훗날 보위를 이을 효명세자마저 요절하면서 그는 더욱더 힘을 잃어 갔다. 세상은 순조의 외가를 중심으로 한 노론의 손에서 돌아갔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결국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꿈을 이루겠다는 뜻을 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수원화성에 새 국가체제 세우려던 정조_3
수원화성에 새 국가체제 세우려던 정조_3

정조 이후 조선의 국운은 급속도로 기울었다.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철종과 고종은 미약한 왕권과 강력한 신권, 그리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외세의 위협 속에 시달려야 했다. 조선의 낙조가 시작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낙조 속을 걸었던 헌종과 고종도 화령전을 종종 찾았다. 그들은 정조의 어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순조가 봉안했던 정조의 어진도 복잡한 정세 속에서 소실되었고, 지금 봉안된 어진은 2005년에 완성된 것이다. 비록 순조가 봉안한 어진은 사라졌지만 융복을 입은 어진 속 정조를 바라보면 가슴에서 깊은 울림이 전해진다. 사도세자, 정조, 순조, 효명세자로 이루어지던 새로운 세상의 꿈! 그 뜨거운 불꽃을 다시 피워 올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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