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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흔적 남은 종로.팔달문 일대.나혜석거리
나혜석을 찾아 떠나는 여행(2)
2012-02-17 13:28:47최종 업데이트 : 2012-02-17 13:28:47 작성자 :   e수원뉴스

종로교회

정조는 수원을 제2의 한양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한양 경복궁 앞에 종각이 있는 것처럼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앞에도 종각을 만들었다. 그래서 수원 사람들은 이곳을 '종로'라고 불렀다. 종로는 정조가 만든 시장인 팔달문시장이 근처에 있어 수원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나혜석 역시 종로거리에 자주 나왔을 것이다. 그녀는 서울 진명여고보로 유학가기 전까지 수원 삼일여자학교에서 공부했다. 성적이 우수하고 특히 그림솜씨가 뛰어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삼일여자학교는 당시 많은 신식학교가 그렇듯이 교회가 세운 학교였다.
수원 지역에 개신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93년, 즉 나혜석이 태어나기  3년 전이다. 동탄면 장지리에 위치한 장지내교회(현 장천교회)가 그 효시다.

나혜석의 흔적 남은 종로.팔달문 일대.나혜석거리_1
나혜석의 흔적 남은 종로.팔달문 일대.나혜석거리_1

하지만 교회가 수원성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1902년부터다. 미국감리회 스크랜턴(Scranton) 선교사가 화령전 근처에 집을 구입하려고 했지만 임금 정조의 어진이 모셔진 곳에 외국 오랑캐의 교당을 지을 수 없다는 화성유수부의 판단에 따라 좌절되었다. 

대신 화성유수부는 성 안의 다른 장소를 몇 군데 추천했는데 그 결과 북문 안 보시동의 13칸짜리 초가를 구입해서 교회를 지을 수 있었다.
이렇게 출발한 교회는 차츰 교세를 확장하게 되어 1913년에는 오늘날 수원 종로거리에 '종로교회'를 짓기에 이른다. 초기에는 함석지붕을 이었고 40평 규모였다. 

당시의 신여성들이 그랬듯이 나혜석 역시 교회를 친근하게 여겼을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는 교육사업을 펼쳐 많은 학교를 세웠는데 나혜석이 다닌 수원 삼일여학교 역시 이 수원교회에서 세운 학교다.
사실 나혜석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만년에는 친구 김일엽이 출가한 수덕사에서 요양을 하며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적응하지 못하고 상경했다. 아마도 늘 세상을 향해 자신을 열어놓고 사는 나혜석의 입장에서는 세상과 절연하는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혜석이 이 교회를 다녔을 가능성은 낮다. 종로교회가 완성되던 1913년, 나혜석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 후 병든 몸을 이끌고 수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종로를 걸으며 이 교회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예배당 안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을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그녀는 무엇을 기원했을까?

요절한 첫사랑 최승구의 영면을 기원했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생이별을 해야 했던 자식들의 건강을 위해 기도했을까? 게다가 그녀는 셋째아들을 병으로 잃는 아픔까지 겪었다.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을 위해 기도했을까? 아니면 이 모든 시련이 지나고 다시 예전처럼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기도했을까?

팔달문시장 일대

정조는 수원을 경제와 군사력을 모두 갖춘 강한 도시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화성(華城)'을 축조했다. 
다른 성들처럼 화성 역시 4개의 큰 대문이 있었는데 각기 의미와 용도가 달랐다.
가장 북쪽의 장안문은 예로부터 양반들과 고관대작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정조가 수원으로 행차할 때도 주로 북쪽의 장안문을 애용했다. 

팔달문이라는 이름은 수원의 주산인 팔달산에서 따 온 이름이고 '팔달'은 '사통팔달(四通八達)'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 팔달문 구역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장소가 팔달문 시장이다. 

사방팔방 뚫려 어디로든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물산의 집적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 이름처럼 실제로 팔달문에는 예부터 시장들이 밀집했다. 지금도 무려 9개의 전통시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그중의 가장 맏형은 팔달문시장이다.

중상주의자였던 정조는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권역에 시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장사하기를 원하는 수원 백성들을 대상으로 6만 냥을 풀어 장사 밑천을 대 주었다. 이렇게 하여 수원에는 두 집 건너 한 집이 가게를 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나혜석의 흔적 남은 종로.팔달문 일대.나혜석거리_2
나혜석의 흔적 남은 종로.팔달문 일대.나혜석거리_2

당시에는 가게를 '가가'로,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을 '가가쟁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점차 변해 '깍쟁이'가 되었다. '수원 깍쟁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마 나혜석이 수원의 삼일여학교를 다니다가 서울의 진명여고보로 전학했을 때도 서울 친구들이 장난삼아 그녀를 '수원 깍쟁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팔달문시장 안에는 '영동시장'이라는 또 하나의 시장이 있다. 영동시장은 정조 시대부터 이미 포목상인과 바느질 장인들이 몰려들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수원에서 제일 좋은 비단과 제일 솜씨 좋은 바느질 장인은 다 영동시장으로 모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의 옷은 유명했다.

나혜석의 집안 역시 영동시장에서 해마다 새 옷이나 이부자리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훗날 최린과의 사련으로 모든 것을 잃고 수원으로 돌아왔을 때의 그녀는 더 이상 영동시장에서 옷을 지어 입을 형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유복한 유년시절의 기억이 어린 팔달문 시장에서, 북적이는 인파 속을 거닐며 회한에 잠겼을 한 신여성의 그림자가 서글프게 다가온다.

못골시장

화성행궁 인근은 예로부터 전통시장 밀집지역이다. 팔달문시장을 거쳐 수원천을 건너 왼쪽으로 내려가면 못골시장이 나온다.

나혜석이 살던 시절의 이곳은 서민 주택가였다. 아마 어린 시절의 나혜석은 이 동네에 올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삼일여학교를 함께 다니던 동기들은 대부분 수원의 유복한 집 딸들이었기에 이 골목에는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먼 훗날, 나혜석은 중년의 나이에 이 골목과 인연을 맺게 된다. 최린과의 사련으로 김우영과 이혼하고 사회적으로 매장이 된 상태에서 그녀는 이젤 하나 달랑 메고 이곳으로 온다. 수원 다른 지역에 비해 방값이 쌌기 때문이다. 

이 골목 허름한 집 2층에 세를 든 그녀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렸다. 나혜석이 살았던 집이라고 알려진 곳이 아직도 못골시장에 남아 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순대집이지만 사실 이 가게의 2층이 나혜석이 머물던 방이라는 말이 있다. 2층 창을 통해 일본식 집들과 조선식 집들이 뒤섞여 나지막한 추녀를 맞대고 있는 골목을 바라보며 나혜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활기찬 시장골목 인파 사이로 문득 그녀가 이젤을 메고 걸어 나올 것만 같다.

나혜석거리

'정조는 취미다'
너무나 파격적인 이 한 마디로 탕녀의 낙인을 찍은 채 쓸쓸히 사라진 나혜석.
유교와 봉건사회의 뿌리가 엄연히 존재했던 당시 조선사회에서 그녀가 그렇게 도발적인 발언과 행동을 했던 데는 스웨덴의 여성운동가 엘렌 케이의 영향이 컸다.

엘렌 케이는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범죄라고 했다. 심지어 아이 때문에 억지로 결혼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불화한 부모 밑에서 사는 것보다 이혼한 편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이 아이의 정서에도 더 좋다고 주장했다.

나혜석 역시 그렇게 믿었다. 더욱이 그녀는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조하는 조선의 남성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분위기를 바꾸지 않는 한 진정한 남녀의 행복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았다.
'정조는 취미다'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사상적 배경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당시로서는 너무나 파격적이고 위험한 발언이었기에 그녀는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그러나 21세기, 그녀는 새로운 조명을 받으며 다시 깨어나고 있다. 수원시 인계동에 자리한 나혜석 거리가 바로 그 증거다.
그런데 처음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6백 미터에 걸쳐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온갖 식당과 카페, 그리고 그 아수라장 속에 외롭게 서 있는 나혜석의 동상과 시비를 보면 실망하게 된다.

나혜석은 일본 조선유학생 사회에서 인기 있는 존재였다. 함께 유학생활을 했던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나혜석은 '빼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시원한 이마, 생기 있는 눈빛, 거침없고 솔직한 발언과 지성미 때문에 참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여성'이었다 그래서 그녀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들끓었다.
김우영과 결혼해 외교관의 아내로 살아가면서는 늘 음악과 미술, 사교와 파티, 여행으로 이루어진 생활을 구가했다. 그녀 스스로도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여인이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나혜석의 흔적 남은 종로.팔달문 일대.나혜석거리_3
나혜석의 흔적 남은 종로.팔달문 일대.나혜석거리_3

그렇다면 지금의 나혜석 거리야말로 생전의 나혜석이 좋아했던 풍경이 아닐까? 밤이 되면 수원의 음악인들이 삼삼오오 몰려와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고 철마다 때마다 시화전이 열리기도 한다.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는 거리에는 타일로 구현된 나혜석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과거 '음탕한 여자'라고 손가락질 받던 그녀였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녀의 동상 옆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녀의 나란히 앉아 그녀의 시비를 바라본다.
나혜석 시비에 새겨진 '인형의 가(家)'는 나혜석의 생애를 관통하는 주제어다.

  인형의 가(家)

                                  정월(晶月) 나혜석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좋아 주게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 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몸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몸이 값없는 것을
내 이제 깨도다.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
많은 암흑 횡행할지나
다른 날,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 

나혜석 동상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검고 견고한 벽이다. 이것은 당시 나혜석이 극복하고자 했던 인습의 벽을 상징한다.
그 벽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이제 그 벽은 현저히 낮아졌다. 여전히 쓸쓸한 표정으로 검은 벽을 바라보고 있는 나혜석 동상을 보고 있으면 옆에 앉아 가만히 어깨라도 안아 주고 싶어진다.
나혜석 거리에서 우리는 노라를 만난다.
아름답고 자랑스런, 그러나 슬픈 운명을 가진 누이, 나혜석을.

참고문헌-  <인간으로 살고 싶다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 이상경 著 -한길사-,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그리고 까미유 끌로델> 정금희 著 -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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