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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柳京)의 꿈이 서린 수원천
2012-03-09 15:57:13최종 업데이트 : 2012-03-09 15:57:13 작성자 :   e수원뉴스

유경(柳京)의 꿈이 서린 수원천_1
유경(柳京)의 꿈이 서린 수원천_1

'왕이 만든 시장' 팔달문시장 앞에는 냇물이 하나 흐른다. 광교산에서 발원하여 흘러 내려오는 이 물은 수원을 대표하는 개천이라 하여 '수원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토박이들 중에는 '버드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 물가에 버드나무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제방이나 강변에 버드나무가 늘어서 있는 것이 신기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수원과 버드나무는 좀 더 깊은 인연이 있다.
영조와 정조 치세기에 이 지구는 세계적인 기후재앙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홍수와 가뭄이 잦아 늘 식량이 부족했다.

영조와 정조 모두 유능하고 어진 임금이었지만 기후까지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영조 때는 곡식 낭비를 막기 위해 금주령까지 내려야 했다.
정조 때에도 잦은 가뭄이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수원의 실개천을 모으고 이어서 대형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 일왕저수지라고 불리는 '만석거'다. 

버드나무와 인연이 많은 수원

그 후로도 정조는 부지런히 수원 곳곳의 하천을 정비하고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그때마다 버드나무를 심었다. 버드나무의 뿌리가 제방을 튼튼하게 잡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원을 '유경(柳京)'이라고도 불렀다. 말 그대로 '버드나무가 많은 수도'라는 뜻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유경이라고 불린 도시가 또 하나 있으니 바로 평양이다. 평양 역시 버드나무가 많아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큼 고구려인의 억센 기상을 누르기 위해 하늘하늘한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원의 버드나무는 다르다. 백성들의 풍요로운 생활을 염원한 정조가 애민의 마음으로 심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경이라는 이름에는 또 다른 의미가 숨어 있다. 본래 유경은 중국에서 황제가 머무는 수도를 부르는 이름이다.
정조는 평생에 걸쳐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자주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그가 유난히 '만(萬)'과 '황(黃)', '황(皇)' 이라는 글자를 좋아한 데서도 그 흔적이 보인다. 만(萬)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숫자요, 황색 역시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색깔이었다.

실제로 정조는 수원 곳곳에 황도(皇道), 혹은 황교(皇橋)라는 지명을 붙여 주었는데 이 역시 당당한 자주국가를 꿈꾼 정조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수원천의 버드나무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분명 정조 역시 화성행궁에 행차할 때 이 버드내를 지났으리라. 푸른 버드나무들을 보았으리라.
그의 평생동지 정약용은 함께 그 광경을 보지 않았을까? 정조의 꿈과 자신의 지식을 통해 완성된 화성의 성벽들을 보며 이 버드내에서 목을 축이지는 않았을까?

유경(柳京)의 꿈이 서린 수원천_2
유경(柳京)의 꿈이 서린 수원천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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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柳京)의 꿈이 서린 수원천_3
유경(柳京)의 꿈이 서린 수원천_3

수원에서 가장 번화한 장소인 팔달문시장과 함께 버드내 역시 수원을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수원에 대기업 공단들이 대거 들어왔을 때가 버드내의 전성기였다. 정조 대에 전국 팔도의 상인들이 이 근처로 모여들었던 것처럼 다양한 사투리를 쓰는 지방 젊은이들이 공단에 취직하기 위해 올라왔던 것이다.

이 젊은 근로자들이 퇴근을 하는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는 천변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월급날이면 근처 팔달문시장과 지동시장은 부모님께 보낼 내의와 옷가지들을 사러 온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시 태어나는 수원천

특히 천변을 따라 죽 늘어선 통닭집들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청춘들은 이 버드내에서 통닭을 먹고 술을 마시며 향수를 달래고, 친구를 만들고, 배우자를 만났다. 버드내에서 데이트하다가 결혼하여 수원에 정착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수원 사람치고 이 버드내에 얽힌 추억 한 가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수원시 도시정비의 일환으로 버드내는 복개되었다. 그리고 그 위로 아스팔트가 깔리고 자동차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수원천 천변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들은 근처 못골시장이나 미나리광시장으로 옮기거나 아예 먼 곳으로 떠났다. 천변에 휘엉휘엉 늘어져있던 버드나무들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버드내는 수원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다.

그러나 오늘날, 버드내가 다시 태어나고 있다. 수원시가 버드내 복원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다시 버드나무들을 심고, 개천도 친자연적인 하천으로 정비하고 있다. 무엇이든 빨리 만들고 높게 쌓아야 한다고 믿었던 산업화시대가 저물자 이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버드내는 단순한 개천이 아니라 수원사람들의 추억이 흐르는 곳이자, 애민군주 정조와 수원사람들의 애틋한 인연이 서린 곳이다. 

지금 수원사람들에게 이곳은 수원천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정조와 버드나무의 인연도, 이곳을 거쳐 화성행궁과 팔달문시장을 들렀을 정조의 이야기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복원사업이 마무리되고 나면 이곳은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버드내'라는 정든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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