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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가 흘린 피의 터전에 선 북수동성당
2012-03-16 12:51:32최종 업데이트 : 2012-03-16 12:51:32 작성자 :   e수원뉴스

순교자가 흘린 피의 터전에 선 북수동성당_1
순교자가 흘린 피의 터전에 선 북수동성당_1

수원의 기독교인들은 방화수류정을 즐겨 찾는다.
십자가 문양이 선명한 벽돌과 천장보를 보기 위해서다. 그들은 천주교인이었던 정약용이 화성을 설계한 만큼 이 십자가 문양 역시 정약용이 의도적으로 넣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정조는 화성 설계작업을 했지만 축성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조의 화성설계도에는 방화수류정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굳이 방화수류정의 십자가 문양이 아니라 해도 수원에는 한국 기독교의 기념비적인 흔적들이 남아 있다. 종로교회와 북수동성당이 그것이다

조선의 임금이었던 정조는 운명적으로 유교의 사고체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타 종교에 대해서도 열린 사고를 갖고 있었다. 특히 노론이 '사교(邪敎)'라고 공격하는 천주교에 대해서도 관대한 자세를 견지했다. 

가장 큰 이유는 천주교와 함께 들어온 서양의 과학문물이 정조에게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다. 눈이 나빴던 정조는 안경을 꼈는데 그 안경 역시 중국에서 수입된 프랑스제였다. 지독한 근시였던 정조로서는 작은 유리알 두 개로 세상이 환하고 또렷하게 보이는 신기한 원리에 매력을 느낄 수 밖게 없었다. 
자연히 서구의 과학문물에 관심이 많아졌고, 적극적으로 이를 배우고자 했다. 따라서 서구의 사상세계인 천주교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무엇보다 정조가 믿고 사랑하는 정약용도 천주교 신자였다. 비단 정약용 뿐 아니라 당시 정조를 따르는 진보적 인사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정조 치세 기간 동안 천주교는 조용히, 그러나 눈에 띄게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정조가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조선에는 피바람이 분다. 정조의 아들 순조가 보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대비는 노론과 손잡고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시작했다. 이것이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다. 

순교자가 흘린 피의 터전에 선 북수동성당_2
순교자가 흘린 피의 터전에 선 북수동성당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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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가 흘린 피의 터전에 선 북수동성당_3
순교자가 흘린 피의 터전에 선 북수동성당_3

무려 100명이 처형당하고 더 많은 수가 유배형에 처해졌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 역시 유배 길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그 후 대부분의 시간을 유배지에서 보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긴 유배생활 속에서도 글을 쓰고 사상을 다듬고 신문물과 실학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30여 년 후 정약용 역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3년 후 조선에는 다시 천주교를 향한 핍박의 바람이 인다.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였다. 수원에서도 숱한 순교자가 나왔다. 병인박해 때만도 77명, 그 뒤 1917년 샘골의 순교자 이용빈을 합쳐 78명에 이른다. 

지금의 화성행궁 앞 광장 중영 자리에서 순교자들의 처형이 자주 이루어졌다. 천주교 신자 정약용이 설계한 화성 한가운데서, 천주교를 관대하게 바라본 정조가 머물던 화성행궁 앞에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죽어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인연일까? 바로 그 슬픈 순교의 현장에 북수동성당이 서게 되었으니! 
1890년 수원읍에 사는 이미카엘, 차시몬, 박베드로  등 세 명의 천주교인이 한요셉 신부를 영접하면서 북수동성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천주교는 교육사업과 봉사를 통해 민중 속으로 들어왔다. 북수동성당은 화양학교를 설립하여 200명의 어린이들을 교육시켰다. 나중에는 수원 8부잣집으로 통칭되는 저택 중 2채를 매입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지금도 북수동성당은 처음 지어진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성당 곳곳에는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의 분위기가 어우러진 흔적들이 남아 있다.

순교자가 흘린 피의 터전에 선 북수동성당_4
순교자가 흘린 피의 터전에 선 북수동성당_4

북수동이라는 이름은 화성의 북수문이 위치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화성이 완공된 후 정조는 정약용과 함께 화성 이곳저곳을 함께 걷지 않았을까? 북수문 근처도 와 보지 않았을까? 

정조는 정약용에게 많은 것을 물었을 것이다. 실학에 대해서, 그리고 천주교에 대해서. 뼛속깊이 유학도인 임금과 진보적인 천주교인 젊은 신하.
종교는 달랐지만 두 사람이 꿈꾼 세상은 같았다. 그것은 천주의 사랑처럼 임금의 사랑이 온 누리에 고루 비치는 나라. 공자가 말한 차별이나 파벌 없이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대동세상이었으니. 

<참고문헌> 
'이산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김준혁 저, 여유당),  '왕이 만든 시장' (브랜드스토리 저, 멋진세상),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김태형 저, 역사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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