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노송지대, 비록 포도와 딸기는 사라졌어도
2012-03-23 12:47:21최종 업데이트 : 2012-03-23 12:47:21 작성자 :   e수원뉴스

정조시대에는 유난히 소나무에 얽힌 일화가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이 현륭원 소나무 숲 송충이 일화다. 
정조는 틈만 나면 아버지의 묘소를 살피기 위해 현륭원으로 행차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해, 현륭원 소나무 숲에 송충이 떼가 창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조는 서둘러 현륭원 소나무 숲으로 향했다.
"여기가 어딘데 이렇게 송충이 떼가 많아지도록 방치했다는 말이냐?'
노기 띤 정조의 음성에 대신들과 관리들은 자라목을 했다. 그러다 다음 순간,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정조가 송충이 한 마리를 잡아 그대로 깨물어 버린 것이다.
"내 아버지의 숲을 어지럽히는 자는 비록 미물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다."
그 순간 소나무 숲 여기저기서 죽은 송충이들이 비 오듯 떨어졌다. 정조의 뜨거운 효심에 하늘이 감동한 것일까?

그러나 현륭원 소나무 숲을 해치는 것은 송충이만이 아니었다. 근방의 백성들이 몰래 현륭원의 소나무들을 훼손하고 있었다. 딱히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가뭄이 들어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느라 그런 것이다. 

그러자 정조는 소나무마다 콩 주머니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배가 고프면 이 주머니 안의 콩을 꺼내먹고 소나무는 훼손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었다. 백성들은 소나무 숲에 매달린 콩 주머니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는 현륭원 소나무 숲을 해치지 않았다. 

노송지대, 비록 포도와 딸기는 사라졌어도_1
노송지대, 비록 포도와 딸기는 사라졌어도_1

지금의 경수산업도로(1번국도) 부근에는 약 5km의  노송이 서 있는 지대가 있다.
이곳을 노송지대라고 부른다. 여기에도 정조의 이야기가 스며 있다.
아버지 묘소를 옮기고 현륭원이라 이름 지은 정조는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내탕금 1000냥을 내리며 지시한다.
"이 돈으로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사서 지지대고개로 가는 길에 심도록 하라."

그곳은 정조가 현륭원을 참배하러 갈 때 늘 거치는 길이었다. 아버지를 향해 가는 길이 황량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내린 조치였다. 

식목관은 정조의 하사금으로 소나무 500그루와 능수버들 40그루를 사서 심었다. 현재 노송지대에 남아 있는 소나무는 바로 그 나무들의 후손들일 것이다. 소나무가 늘어선 길가에는 목민관들의 공덕비와 송덕비들이 늘어서 있었다. 

세월이 지난 뒤 이 노송지대는 수원딸기와 포도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명소가 되었다. 수원은 특히 딸기가 유명했는데, 다른 지역의 딸기가 거의 들어갈 시기인 5월경에 출하되기 때문에 더욱 인기가 있었다. 특히 그즈음에는 노송지대의 솔꽃가루가 한창 날릴 때라 딸기 표면에 하얀 가루가 앉아 있었다.

덕분에 정조의 효심으로 형성된 노송지대는 늘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는데 그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행락객들과 자동차가 너무 많이 모여드는 바람에 소나무가 많이 훼손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노송지대는 많이 축소되었다.

수원딸기와 포도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교통이 발달하고 집집마다 승용차를 갖게 되면서 행락객들이 아예 농원으로 가는 바람에 노송지대는 활기를 잃게 되었다. 길가에 서 있던 공덕비와 송덕비는 수원역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노송지대, 비록 포도와 딸기는 사라졌어도_2
노송지대, 비록 포도와 딸기는 사라졌어도_2

하지만 몇 그루 남지 않은 소나무일망정 이곳을 지키고 서 있는 것이 고맙다. 거칠거칠한 소나무를 끌어안으면 딸기향, 포도향, 즐거운 소음, 그리고 정조의 마음이 느껴진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