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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사과학박물관서 느낀 정조대왕 애민정신
2012-04-06 13:54:08최종 업데이트 : 2012-04-06 13:54:08 작성자 :   e수원뉴스

서호 잠사박물관에서 정조의 따듯한 마음을 느낀다

'의식이 족해야 염치를 아는 법'이라는 속담이 있다. 의식주가 해결된 후에야 인간으로서 예의와 도리를 다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정조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삼강오행도를 널리 퍼뜨리고 효를 강조한다 해도 백성들이 먹고 입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  
'식(食)'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석거를 파고 국영농장 대유둔을 만든 정조는 '의('衣)'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뽕나무를 심었다. 서호 근처에 가면 정조의 그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잠사과학박물관이다.
  

잠사과학박물관서 느낀 정조대왕 애민정신_1
잠사과학박물관서 느낀 정조대왕 애민정신_1

일단, 입구부터가 다르다. 키 작은 고목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공간에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이 보인다. 이것이 잠사과학박물관 본관이다.
정조가 애민의 손길로 선진농업의 발판을 마련한 수원을 일제는 놓치지 않았다. 1913년 만든 권농모범장을, 1917년 수원으로 옮겨왔다. 이것이 농촌진흥청의 효시이다.

또한 일제는 1917년 정조가 '축만제'를 지어 유명해진 서호 근처인 이곳에 농업과학기술원 잠사곤충부를 만들었다. 당시 생잠과, 견사과, 재상과의 3개과 잠업기구가 있었는데 지금의 이 건물은 견사과 건물로 사용되던 곳이다. 견사과, 즉 실을 연구, 생산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공장처럼 이용되기도 했다.

잠사과학박물관 정문은 한눈에 보기에도 일본풍이 느껴진다. 심지어 '잠사과학박물관'이라는 현판까지 한자로 쓰여 있어서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마치 일제강점기부터 이곳에서 잠사과학이 뿌리를 내린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수원에 잠사의 뿌리를 내린 사람은 정조다. 그가 서호 주변에 뽕나무를 심게 함으로써 수원 잠업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검소한 임금 정조는 고기를 입에 잘 대지 않았고 그나마도 하루 두 끼만 먹었다. 비단 보료 대신 부들자리를 깔았다. 봄·여름에는 삼베옷을, 가을·겨울에는 무명옷을 입었다. 그나마도 헤어지면 기우고 또 기워 입었다. 그러면서 늘 백성들에게 비단옷을 입히는 꿈을 꾸었다. 

특히 자신이 공들여 가꾸고 있는 신도시 수원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정조는 수원사람들에게 하루빨리 비단옷을 입히고 싶었다. 게다가 뽕은 버릴 게 없는 식물이다. 잎으로는 누에를 쳐 비단을 얻을 수 있었고, 뽕나무에서 자라는 상황버섯과 오디열매는 귀한 약재가 되었다. 

수원에 잠사의 뿌리를 내린 인물은 정조

그리하여 정조는 수원 서호 주변을 비롯, 화성성곽 밖 북동쪽 땅 관길야 뽕나무를 심게 했다. 서호의 뽕나무들은 수원 사람들에게 정조가 보내는 사랑의 선물이었다. 훗날 일제는 바로 그 자리에 농업시험장을 만드니 지금의 잠사과학박물관이 바로 그곳이다.

잠사과학박물관은 견사곤충관, 견사가공과학관, 양잠관, 견사가공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이 가로 세로 50㎝ 되는 선반 위에 놓여 있는 누에들이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다 살아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보호막이 없는 선반인데도 누에들이 그곳을 벗어나지를 않는다. 이것은 중국산 누에들이다.
누에는 흔히 중국산, 일본산, 유럽산, 인도산으로 나뉘는데 국내에서 생산되는 누에는 중국산과 일본산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누에들이 국적(?)에 따라 다른 행태를 보인다. 

잠사과학박물관서 느낀 정조대왕 애민정신_2
잠사과학박물관서 느낀 정조대왕 애민정신_2

아침에 일어나 활동을 시작할 때 쯤, 중국산 누에들은 서로 모여들어 군집을 이룬다. 반면 일본산 누에들은 먹이를 찾아 각각 뿔뿔이 흩어지며 울타리를 넘는다.
이곳에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누에들의 습성을 두 나라 국민성에 비유하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진다. 역사 속 중국인들은 중국산 누에들처럼 무조건 자기들 안으로 똘똘 뭉치는데 일본인들은 밖으로 나가 침략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일본인들이야말로 단결력이 강한 국민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게다가 중국인들은 오래 전에 세계 각국에 진출하여 화교상권을 이루지 않았는가. 따지고 보면 오히려 중국인은 일본누에를, 일본인은 중국누에를 닮은 것 같다.

그런데 누에의 습성을 중국인과 일본인의 국민성에 비유한 이 농담은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기원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아마도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일하던 조선인 연구원들 사이에서 시작된 농담은 아니었을까? 당시 조선인들은 아무래도 중국에 대해 동병상련을, 일본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느꼈을 테니.
문득 한국 누에가 있다면 어떤 행태를 보일까 생각해 본다. 월드컵 때 보인 붉은악마 물결처럼 다들 똘똘 뭉쳐 신나게 선반 위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지 않을까? 우리는 흥(興)의 민족이니.

체험관서 직접 누에치기 해볼 수 있어

누에도 트렌드를 거스를 수는 없는 걸까? 칼라 누에들도 눈에 띈다. 염색이라도 한 걸까?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사료에 칼라염료를 넣어서 먹인 것이다. 이 칼라 누에들은 자기의 몸 색깔과 같은 색깔의 실을 뽑아낸다. 
이렇게 다양한 색깔의 누에들이 시중에 나오자 요즘은 새로운 유행이 일어나고 있다. 가정에서 개나 새를 키우듯이 누에를 키우는 것이다. 삶의 수단이었던 누에가 이제는 사람들의 감성을 움직이는 반려동물로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체험관에서는 직접 누에치기를 체험해 볼 수 있다. 꼬물거리는 누에를 만져볼 수도 있고, 뽕잎을 먹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고치에서 실을 뽑는 체험은 이곳을 찾은 관람객들이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다.

한쪽에서는 누에들이 토해낸 실로 만든 고치들이 전시되어 있다. 누에의 색깔에 따라 고치의 색깔도 다른데 이것이 한데 모여 있어 아름다운 한 편의 그림 같다. 하나의 고치에서 뽑을 수 있는 실의 양은 보통 1500미터. 오늘날은 기술이 더 발달해 2000미터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 작은 누에의 몸 어디서 이렇게 길고 아름다운 실이 나올 수 있는 걸까?

양잠과학관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일본풍이 분명한 구름다리를 건너야 한다. 누에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이 구름다리에 서면 그제야 이 건물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
만약 정조가 이것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가 서호에 뽕나무를 심고 양잠을 장려한 것은 수원을 경제자족도시로 만들고, 그러한 수원을 기반으로 조선을 강한 자주국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고작 100년 만에, 일제는 정조가 뽕나무를 심은 이곳에서 양잠업 연구를 시작하고 그들의 흔적을 또렷하게 남겼다. 정조가 만든 기반 위에 만들어진 외세의 흔적!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배격하여 제후국의 숫자인 천(千)을 버리고 굳이 만(萬)이라는 숫자를 강조했던 정조의 눈빛이 느껴져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일어난다.

양잠관에는 옛 시골농가가 잘 재현되어 있다. 여기서는 누에를 치고 길쌈을 하는 장면을 인형과 사진으로 표현해 놓았다.
누에는 무척 예민한 생명체다. 빛이 잘 들지 않는 그늘을 선호하지만, 습기는 싫어한다. 작은 소음에도 금방 예민해져 실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누에를 치는 방은 늘 조용하고 청결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옛 여인들은 된장과 간장 담글 때 몸을 정결히 하고 입에 한지를 댄 것처럼 누에를 칠 때도 수다를 삼가고 경건한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 

누에를 치는 것은 조선시대 여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해마다 왕비가 직접 선잠단에서 뽕잎을 따 누에에게 먹이는 행사를 열어 양잠을 장려했다. 이것은 조선 왕비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공무였다.
문득 정조의 정비였던 효의왕후가 떠오른다. 그녀 역시 해마다 선잠단에서 뽕잎을 따 누에에게 먹였을 것이다.
그는 정조의 정적(政敵)인 노론집안의 여식이었다. 게다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홍역을 앓는 바람에 얼굴이 얽었다. 그러니 여자로서의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후궁들이 줄줄이 임신을 할 때 그의 마음은 얼마나 복잡했을까? 결국 그녀는 상상임신까지 할 지경에 이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조의 총신이었던 홍국영은 여동생을 무리하게 후궁으로 넣었다가 요절하자 그 죽음 뒤에 효의왕후가 있다고 생각하고 암살시도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뒤에서나마 정조의 개혁을 도우려고 애를 썼다. 친정 식구들이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늘 감시하고, 대궐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평생 베옷을 입은 정조 못지않게 그녀 역시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정조가 죽은 뒤에도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나는 거친 베옷을 입을지언정 백성들에게는 비단옷을 입히고 싶다'는 남편의 뜻을 그녀는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선잠단에서 누에를 칠 때마다 남편의 그 말을 떠올렸으리라. 

견사가공과학관으로 들어서면 갑자기 70년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하다. 마네킹들이 입고 있는 비단옷의 디자인과 색깔 등이 어딘가 촌스럽게 느껴진다.
1962년 이후 정부는 잠업생산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인 기술연구와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하여 1976, 한국 양잠산업은 최전성기를 구가한다. 당시 양잠호수가 488,000호에 이르렀고, 전국적으로 19,296,000마리의 누에를 사육했으며, 41,700톤의 고치를 생산했다. 그리하여 잠사 수출로만 2억7천만 달러를 벌어 들였다.

새로운 활로를 찾는 양잠사업

하지만 스러지는 촛불이 내는 마지막 불꽃이었을까? 1976년 세계적인 오일쇼크로 국내 인건비가 높아지고 공장의 채산성이 떨어진데다가 나일론 같은 저가 소재가 등장하면서 국내 양잠산업은 급속도로 위축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신은 늘 문 하나를 열어놓으신다'는 말처럼, 양잠산업도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다. 이제는 입는 누에에서 먹는 누에, 바르는 누에로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누에의 먹이인 뽕잎을 활용한 국수, 누에를 활용한 비누와 술, 음료, 그리고 화장품 등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마당으로 나오면 두 그루 고목이 눈에 들어온다. 스트로브 잣나무. 미국이 원산지다. 이 나무가 지금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은 1917년. 잠업시범소가 설 당시 기념으로 심은 것이다. 그러니 100살 가까이 되는 셈이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연구원들이 이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했을까? 멀리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일본인 연구원도 있었을 것이고, 은근한 차별에 분노를 삭이던 젊은 조선인 연구원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국경을 초월해 따뜻한 동지애로 함께 밤을 새우며 연구하던 젊은 연구원들도 있었을 것이다. 두 그루 나무는 그들의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았을 것이다. 1945년 여름,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조선이 해방되던 날! 조용히, 그러나 열띤 음성으로 함께 감동을 나누었을 조선인 연구원들. 착잡한 얼굴로 짐을 싸서 이곳을 떠나간 일본인 연구원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나 오로지 누에에 미쳐 연구에 일생을 바친 연구원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석별의 정을 나누는 모습도.

잠사과학박물관서 느낀 정조대왕 애민정신_3
잠사과학박물관서 느낀 정조대왕 애민정신_3

서호 부근에 처음 뽕나무를 심었던 정조도 가고, 그 자리에 이 건물을 세웠던 일본인들도 갔다. 그리고 이제 이 잠사과학관 자체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듯하다. 2014년 농촌진흥청이 전북 완주로 이전하면 이 과학관은 폐쇄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농촌진흥청이 완주로 이전한 후에도 잠사과학관을 복관할 계획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백성을 위해 뽕나무를 심은 어진 군주의 마음. 전쟁의 잿더미에서 누에를 치며 재기를 꿈꾼 우리 부모님 세대의 희생. 그리고 끝없이 베풀어 주는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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