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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의 옛 전쟁, 검술장면들은 실감나지 않을까?
최형국 저,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
2013-02-21 11:37:30최종 업데이트 : 2013-02-21 11:37:30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왜 우리의 옛 전쟁, 검술장면들은 실감나지 않을까?_1
왜 우리의 옛 전쟁, 검술장면들은 실감나지 않을까?_1

도서출판 혜안 펴냄, 지은이 최형국(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 288쪽, 값 2만6천원, 신국판

우리는 서양 중세 기사들의 기병전이나 중국 무사나 일본 사무라이들의 검법, 진법 등을 실감나게 다룬 영화나 책들을 보면서, 왜 우리의 옛 전쟁, 검술장면들은 그렇게 실감나지 않을까라고 묻곤 한다. 그 바탕에는 우리나라 전쟁사나 무예사에 대한 연구의 양․질적 빈곤이 자리잡고 있다.

최형국 박사가  지은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는 실제 무예를 수련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기존의 이론적 틀에 실기적 관점을 접목시킴으로써 역사학으로서의 무예사에 보다 본질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국가 위기를 겪은 뒤,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에 대한 무예사적 특성과 이에 따른 전술적 변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저자는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끊임없이 수정과 보완을 거듭해 왔고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고 본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중 특수한 병종인 기병이라는 구체적인 병종에 대한 접근을 통해 조선시대의 무예사를 보다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고 당시 전술의 변화 그리고 정치 사회적인 변화상까지도 확대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기존의 기병에 대한 제도사적 접근의 한계와 연구 시기의 협소성을 뛰어넘어, 기병의 전술사적 연구와 더불어 기병이 훈련했던 마상무예의 실기를 수련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조선후기 전반에 걸친 기병의 마상무예 변화와 특성을 살펴본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 저자소개 :최형국
본 서의 저자인 최형국은 실제 조선시대 전통무예를 수원 화성에서 20여년 간 수련해온 실제 무예인으로 이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무예사를 전공하여 중앙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말 그대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삶을 현실에서 보여주는 역사학자다. 

특히 본 서의 주제인 마상무예 뿐만 아니라 전통무예 전반을 집중적으로 수련하여 실기사를 바탕으로 한 무예사 연구의 시초를 연 조선시대 군사/무예 전문가다. 현재 수원 화성행궁에서 매일 시범 공연되고 있는 '무예24기' 상설공연(수원문화재단 주관)의 수석단원 및 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원 화성과 정조대왕의 무예사적 연구를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 아카데미 강사를 역임하였고, 중앙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홈페이지 http://muye24ki.com)

■ 책 내용 요약
조선은 건국 당시부터 기병을 중심으로 한 오위진법(五衛陣法) 전술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는 당시 주적인 여진족의 핵심전술이 기병체제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전기 무관의 등용문이었던 무과의 실기시험에서 기사(騎射)와 기창(騎槍) 및 격구(擊毬) 등의 마상무예가 핵심 과목으로 인정되었다.
이후 16세기 말까지 큰 전란이 발생하지 않아 기병 위주의 전술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기병 위주의 전술체제로는 일본군의 조총과 창검을 비롯한 단병접전술에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훈련도감의 삼수병(三手兵)체제는 이러한 기병 위주의 전술체제를 보병 위주로 변화시킴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었다. 특히 임진왜란기 마상무예의 경우는 대표적으로 단순한 기사(騎射)가 실전성을 극대화시킨 기추(騎芻)방식으로 변화 발전하였다.
17세기 들어 청나라의 위협이 높아지면서 조선은 보병 중심의 전술로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광해군대의 협도곤(夾刀棍)과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는 보병뿐만 아니라 기병에게도 효과적인 무예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기병에 대한 보병전술을 강화하기 위하여 보병의 대기병전술이 담긴 '연병지남(練兵指南)'을 군영에 보급하였다. 그러나 심하전투(深河戰鬪) 및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포수(砲手) 위주의 보병전술로는 기병 위주로 편성된 청의 군사력을 감당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이후 효종대에는 북벌을 명분으로 한 지속적인 금군 기병 확대가 이루어져 다양한 마상무예가 훈련되었다. 특히 숙종대에는 청과의 대립을 비롯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조선 내부의 변란 등으로 함경도의 친기위(親騎衛)와 평안도의 별무사(別武士), 경상도의 별기위(別騎衛) 등 지방에 특수기병대가 증설되면서 기병 강화정책은 중앙군영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마상무예는 무과시험에서 사용한 단순한 연결자세 위주의 투로형 기창(騎槍)에서 기병과 기병이 교전을 벌이는 방식으로 변화·발전하였으며, 금군을 비롯한 중앙군영의 기창훈련 규범으로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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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의 인물이 저자 최형국 박사이다

영조대에는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조선전기의 오위체제 복구론이 등장하였고, 오위진법의 복구를 위한 기병 중심의 금군 재편성과 이를 위한 병서가 재간행되기도 하였다.
이후 정조대에는 장용영(壯勇營)을 중심으로 한 기병 강화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사도세자가 만든 보병무예 중심의 '무예신보(武藝新譜)'에 마상무예 여섯 가지를 추가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간행하여 중앙군영과 지방군에 보급하였다. 
또한 이와 함께 편찬된 병서인 '병학통(兵學通)'과 '이진총방(肄陣總方)' 등에는 기존 병서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기병의 다양한 진법들이 실려 있어 기병전술 강화를 의도했다. 이러한 기병 강화 정책은 화약무기의 발달과 함께 정조대에 완성된 거·기·보(車騎步) 통합전법에서 기병의 역할을 극대화시킴으로써 화약무기 연속 사격의 단점을 보완하여 다양한 전술구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더불어 기병의 마상무예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마상편곤이 무과시험 과목으로 채택되는 등 기병의 필수무예로 정착되었다. 마상편곤은 적에게 깊숙이 접근하여 근거리에서 빠르게 적을 타격할 수 있어 기존의 환도나 기창보다 효과적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의 정비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크게 쇠퇴하였다. 기병전술과 마상무예 쇠퇴 현상은 중앙군영의 지속적인 약화와 지방군 기병의 위상 저하에서 기인하였다. 순조대에는 장용영 및 중앙군영의 핵심 기병대였던 선기대와 친군위가 해체되었다. 이후 기병은 군정의 문란과 무사에 대한 천시 등을 이유로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갔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살펴보면 기병과 마상무예의 약화가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당시 전술사적 변화였던 화약무기의 발달에 따른 변화라고 볼 수 있다. 
토벌군의 구성과 전투과정에서도 기병을 활용한 전술보다는 화약무기인 조총과 대구경 화포를 이용한 전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훈련대장 박종경(朴宗慶)이 편찬한 '융원필비(戎垣必備)'가 화약무기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것에서 당시의 변화하는 전술사적 특징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기병의 핵심 업무가 국왕 원행 호위나 궁궐 숙위 부분으로 한정되었으며, 마상무예의 경우도 기병의 쇠퇴현상에 따라 점차 궁궐 숙위병 위주로 한정되어 훈련되었으며, 이후 화약무기의 급격한 발달로 인하여 그 실효적 가치를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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