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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더스] 억새를 품에 안은 명성산
2021-11-05 17:05:03최종 업데이트 : 2021-10-30 10:30:00 작성자 :   연합뉴스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에 간 적이 있다. 뽀얀 먼지가 휘날리는 황무지를 달리고 있을 때 솜사탕 무리가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무릎 높이의 갈대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갈대의 춤사위가 너무 매혹적이어서 차를 세웠다. 갈대만이 끝없는 지평선을 이어가는 풍경에 넋을 잃고 한참 머물렀다.
옛날에는 바다였던 곳이 지각 변동으로 땅이 되고, 다른 식물들은 살지 못했지만 갈대만이 살아남아 밭을 이른 풍경은 지금까지도 최고로 멋진 풍경의 하나로 추억에 남아 있다.
충남 서천국립생태원에는 억새 길이 있다. 억새의 키가 아주 커서 사람이 들어가면 금세 파묻힌다. 오로지 억새와 하늘만 보이는 세상이다.
이 두 곳이 내가 지금껏 봤던 풍경 중 가장 멋있는 장소다. 하지만 너무 멀어 근교에 있는 명성산으로 억새 나들이를 갔다. 축제 기간을 피하기도 했지만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려 인적이 드문 산길을 산책하듯 오른다.
6만 평(약 20만㎡)의 억새밭이 자아내는 늦가을 풍경이 장관인 명성산 억새 군락지는 우리나라에서 '억새 감상 1번지'로 불린다. 서울에서도 가까워 억세 축제 때는 줄을 서서 걸어야 할 만큼 큰 사랑을 받는다. 산자락에 산정호수를 끼고 있어 등산하기도 좋고, 호수 주변을 걸을 수도 있다.
능선 넘어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모습이 산행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얘기되며 1997년부터는 '산정호수 명성산 억새꽃 축제'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억새밭까지는 한 시간쯤 올라가야 한다. 산에 오르지 않고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억새밭은 산 중턱에 꼭꼭 감춰져 있어 올라가야만 풍경을 내어준다.
계곡으로 들어서니 들려오는 물소리가 마치 궁예와 그를 따르는 일족들의 울음소리인 양 애달프다. 태봉국을 세운 궁예의 애환에 대해선 호수 뒤편에 병풍처럼 펼쳐진 웅장한 명성산에 전설로 이어져 오는 얘기가 있다.
망국의 슬픔을 통곡하자 산도 따라 울었다고 하는 설과 왕건의 신하에게 주인을 잃은 신하와 말이 산이 울릴 정도로 울었다 하여 울음산으로 불리다 '울 명'자와 '소리 성'자를 써 명성산으로 부르게 됐다는 전설이다.
계곡과 폭포, 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폭포의 모양새가 다채롭고 아름다워 자꾸 발걸음을 붙잡힌다. 등룡폭포는 특히 감탄스러웠다. 3m는 족히 될 듯한 바위 위에서 하얀 광목천처럼 희고 긴 물줄기가 3단 점프를 하듯 밑으로 쏟아져 내린다.
기대가 없으면 기쁨도 더 큰 법. 등룡폭포에 대한 지식이 없던 터라 멋진 모습이 더 장관으로 다가왔다. 폭포 바닥에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올려 바라보고, 다시 다리 위에서 턱을 받치고 아득한 계곡 아래를 내려다본다.
폭포를 지난 후부터는 어느새 무념무상에 빠지게 된다. 명성산은 돌이 많은 산, 아니 그냥 돌산이다. 산길에 일부러 바위를 부숴 놓은 것처럼 잔돌이 많고, 의자만큼 큰 돌들도 있어 계속 걸으니 발바닥이 아프다.
하지만 길은 그렇게 험하지 않다. 아이들이나 강아지도 힘들지 않게 오르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인다.
얼마나 올랐을까. 듬성듬성 억새가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고작 몇 그루이고, 여전히 산길만 보여 다리를 끌다시피 하며 마지막 고비를 오른다. 질퍽한 진흙투성이 자갈밭을 지나 간신히 마지막 깔딱고개를 넘었을 때 드디어 감춰졌던 억새밭이 모습을 나타낸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오며 힘들었던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백록담도 아니고 오름도 아니면서 마치 분화구처럼 패인 분지에 연약한 줄기의 억새들이 저희끼리 맨몸으로 부딪치며 뒤흔들리는 모습이 환상적이다.
억새밭은 전망대까지 나무 데크로 연결돼 있다. 마치 하늘이 열리듯 뻥 뚫린 분지에서 억새들이 정처 없이 나부끼고 있다.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다 억새다. 대지를 뒤덮은 억새들이 하얗게 부서지고, 멀리 산봉우리들은 물결처럼 일렁인다. 장쾌하게 펼쳐지는 산봉우리와 곱게 물든 단풍, 여기에 억새까지 어우러지니 장관이 따로 없다.
여기저기서 사진 찍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의자에 앉아 저 아래 마을까지 내려다보며 한참 멍하니 앉았다가 감동은 마음속에 고요히 접어두고 발걸음을 내디딘다.
자연과 사람을 품에 안은 즐거운 축제라는 주제로 산정호수와 명성산 일대에서 펼쳐지는 축제는 억새밭 작은 음악회 등의 구성으로 가을날의 낭만 속에 흠뻑 빠질 수 있게 해준다. 명성산 억새꽃 축제는 한번 다녀간 사람이라면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마이더스] 억새를 품에 안은 명성산

[마이더스] 억새를 품에 안은 명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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