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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대고개에 얽힌 정조대왕의 효심과 애민정신
2012-03-30 16:13:34최종 업데이트 : 2012-03-30 16:13:34 작성자 :   e수원뉴스

지지대고개

"오신다, 오신다!"
웅성거리며 모여 있던 남루한 차림의 사내들이 벌떡 일어섰다.
"어디? 어디? 정말 주상전하가 오신다는 거요?"
미륵부처 앞에서 치성을 드리던 여인들도 달려왔다. 

이곳은 미륵고개. 한양에서 수원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갯길이었다.
원래는 미륵부처상에 치성을 드리기 위해 여인네들이 자주 찾았으나 얼마 전부터는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다양한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바로 이곳으로 정조의 행차가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를 현륭원에 모신 정조는 그 뒤부터 틈만 나면 수원을 찾았는데 그때마다 이 미륵고개를 넘어왔다. 백성들은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지지대고개에 얽힌 정조대왕의 효심과 애민정신_1
지지대고개에 얽힌 정조대왕의 효심과 애민정신_1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들 손에 손에 징과 꽹과리를 들고 있다는 것이다. 낡았지만 깔끔하게 손질된 도포를 입고 갓을 쓴 노인은 달필로 쓴 편지를 들고 있었다.  
이윽고 정조 일행이 미륵고개에 나타나자 백성들은 일제히 징과 꽹과리를 치며 행렬을 막아섰다. 효성이 지극한 성군에게 풍악이라도 들려 드리려는 걸까?

"전하! 소인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 주소서."
"전하! 쇤네의 한을 풀어 주소서."
임금의 행렬이 지나갈 때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징과 꽹과리를 울리며 자신의 청을 들어 달라고 조르는 백성들! 죽음이라도 각오한 걸까?

그러나 아무도 이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렬이 천천히 멈추더니 관원 몇 명이 달려 나와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곤 줄을 세우기 시작했다.
"자자, 연로하신 분부터 먼저 아뢰도록 합시다. 뙤약볕 아래 너무 오래 서 계시면 위험하니까요."
백성들은 차례차례 나아가 자신들의 억울한 사연을 말하고 관원들은 정확하게 이를 받아 적었다.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사연을 써서 냈다. 

'임금은 늘 구중궁궐에 있지만 마음은 늘 백성들과 있어야 한다. 임금과 백성은 직접 만나야 한다. 그래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한 정조는 자신이 수원으로 행차할 때면 백성들이 누구나 자기의 억울한 사연이나 희망사항을 말하게끔 했는데 이것을 '격쟁'이라 한다.

미륵고개는 격쟁의 장소로 유난히 인기가 있었다. 정조가 이 고개에 이르면 반드시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고 한양으로 돌아갈 때면 유독 이 고개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현륭원이 있는 화산(花山)이 조금이나마 보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물기 전에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보다 못한 내관이 조심스럽게 아뢰지만 정조는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이루려 하신 꿈을 완성하기 위해 한 발 한 발 전진하고 있사옵니다. 소자를 응원해 주시옵소서. 힘을 주시옵소서.'
문득 그의 시선이 길가에 서 있는 미륵부처상에게로 향했다. 근방 사람들이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이 미륵부처를 찾아와 기도를 한다고 했다.
미륵불은 미래의 부처다. 고난과 슬픔으로 점철된 이 세상이 마지막을 맞이하는 순간 찾아와 사람들을 구해 준다는 부처였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 확실한 것은 현재다. 미래의 복을 기원하며 현실을 버티는 것이 정녕 행복한 일일까? 과연 미륵부처만이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그 일은 임금인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그래. 내가 미륵불이 되겠다. 내 백성을, 내 손으로 구해 내겠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기도 하셨으니.'

내관이 몇 번 더 재촉한 연후에야 정조는 마지못해 한양으로 발길을 돌렸다. 행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멀어지는 정조를 눈물로 배웅했다.
"우리 어진 전하! 전하의 효심이 하늘에 닿으실 겁니다요."
"하느님! 우리 성군이 오래오래 우리와 함께하시게 해 주세요."

훗날 사람들은 이 고개를 '지지대(遲遲臺)고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지(遲遲)'는 '느릿느릿해진다'는 뜻이다. 원래는 공자가 조국 노(魯)나라를 떠나면서 남긴 '지지(遲遲)하도다, 나의 발걸음이여!'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여, 백성들의 탄원을 들어주고자 몇 번이고 발을 멈춰 섰던 지지대. 이제는 지지대비만 남아 정조의 효심과 애민의 마음을 전해 주고 있다.

미래의 부처에게 기대는 백성들을 현실의 임금인 자신의 품으로 안아 들이고자 했던 어진 임금, 정조. 그를 생각하면 우리의 발걸음 역시 지지(遲遲)하게 된다. 그래서 여전히 이곳은 지지대다. 그리움의 고개, 지지대.
민중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던 미륵불은 여전히 지지대에 있다. 그러나 단단한 자물쇠로 잠긴 문 안에 갇힌 채다. 이 미륵불도 정조를 보았을까? 징과 꽹과리를 울리며 억울함을 하소연하던 백성들, 그들을 인자하게 바라보던 어진 임금 정조를 기억하고 있을까? 
 
효행공원

'수원 사람은 발가벗고도 천리를 뛴다'는 속담이 있다. 언뜻 '수원 깍쟁이'와 연관 지어 생각하면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다 한다'는 뜻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옛날 수원의 어느 선비가 타지에서 한밤중에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놀란 그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수원을 향해 달려갔다. 천 리길을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사람들은 점잖은 양반이 발가벗고 뛴다고 손가락질했으나 곧 사정을 알고는 그 선비의 효심에 감동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원 사람은 발가벗고도 천리를 뛴다'는 말은 수원인의 깊은 효심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수원은 '효의 도시'로 통한다. 

그러나 수원이 효원의 도시로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정조 때문이다. 
"아침저녁 효도 다하지 못하고 오늘 또 화성에 왔구나.
묘소에는 부슬부슬 이슬비 내리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잠든 화산(花山)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발걸음을 늦추었다는 지지대. 정조의 이 애틋한 효심은 지지대 고개 근처에 효행공원(孝行公園)으로 남아 있다. 
공원 뒤뜰에는 정조대왕 동상이 관람객을 맞아 준다. 1986년에 수원시에서 건립한 동상으로 조각가 안찬주 선생의 작품이다. 동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취지문이 있다.

<정조대왕 동상 건립 취지문>
수원시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장을 꾸미고 있는 것은 바로 정조대왕의 재위시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 수원시에 산재한 대부분의 유적지는 정조대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 유물 유적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정조대왕의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로 인하여 수원이 효원의 도시로 표상되어 대왕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정조대왕 동상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1986년 9월 15일 수원시장-

지지대고개에 얽힌 정조대왕의 효심과 애민정신_2
지지대고개에 얽힌 정조대왕의 효심과 애민정신_2

사도세자는 역모 죄를 쓰고 죽었다. 그렇다면 정조는 역적의 아들이다. 역적의 아들이 어찌 왕이 될 수 있을까?
이 점을 우려한 영조는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넣었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맏아들이자 사도세자의 이복형으로 요절하여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던 날, 어린 정조는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사도세자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온전히 잊은 듯이 행동했다. 그러다가 보위에 오른 날 저녁, 그는 이렇게 외쳤다.
"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가슴 속 깊이 감추어 두었던 한 마디!
자신의 정체성을 천하에 밝히는 이 한 마디! 

그리고 재위 내내 그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살았다. 사도세자가 못다 이룬 개혁의 꿈을 완성하기 위해 수원에 화성을 축성하고 임금과 백성이 하나 되는 대동세상을 준비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정조대왕 동상은 수원 화성 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효행공원에는 정조의 자연을 사랑하는 정신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정조는 수원부 읍치를 새로 만들고 무려 천이백만 그루의 나무를 심은 분이었다. 그 정신을 잇기 위해 생태미술체험관이 존재한다. 어린이들이 정조의 자연사랑 정신과 오늘의 생태를 체험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정조는 검소한 임금으로 유명하다. 비단보료 대신 바닥에는 늘 부들자리를 깔았고, 봄·여름에는 거친 삼베옷을, 가을· 겨울에는 무명옷을 입었다.
식탐이 없어서 특별히 음식을 가리지도 않았고, 대단한 소식가이기도 했다. 평생 하루 두 끼만 먹었고, 그나마도 소박한 나물 반찬 몇 가지가 전부였다. 

그는 열정적이고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늘 책을 가까이 했고 박학다식했기 때문에 공부를 게을리 하는 대신들은 여지없이 망신을 당하기 일쑤였다. 

수원화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정조의 어진(표준영정)말고 또 다른 정조의 얼굴도 전해진다.
얼굴에 살집이 많고, 쌍꺼풀진 큰 눈이 인상적이다. 조용한 선비이기보다는 호방한 무인 같은 인상을 준다.
정조는 어릴 때부터 여러 차례 암살위기를 겪으면서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무예에 전념했다. 특히 활을 잘 쏘아 '신궁(神弓)'이라 불리기까지 했다. 부친 사도세자 역시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호방하여 타고난 무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정조의 뛰어난 무예실력은 사도세자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리라.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그 뜻을 따르려 했던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산(花山) 현륭원으로 옮긴 후 자주 참배를 하러 왔다.
실상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 행차는 백성들과 만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외형으로만 보자면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도화서 화원이 그린 '정조대왕 능행도'라 불리는 '화성행행도팔첩병(보물 1430호)'은 당시의 국가적인 행사를 객관적으로 묘사한 기록화다. 그러나 아버지와 백성에 대한 정조의 사랑을 생각하며 이 그림을 바라보면 마음 한켠이 따뜻해진다. 억울한 사정을 고하기 위해 백성들이 울리는 징 소리, 성군을 향한 함성, 그리고 인자한 정조의 미소가 떠오른다.  

마당에는 널찍한 잔디광장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결혼식장으로 무료 임대되고 있다. 형편이 어려운 부부, 독특한 결혼식을 원하는 부부들이 이 잔디광장에서 성혼서약을 한다. 만약 정조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그 역시 이곳을 무료로 임대해 주었으리라. 그리고 새 출발하는 부부의 행복을 빌어 주지 않았을까?

지지대고개에 얽힌 정조대왕의 효심과 애민정신_3
지지대고개에 얽힌 정조대왕의 효심과 애민정신_3

그건 그렇고 정작 정조의 결혼생활은 어땠을까? 그는 11세 때 청풍 김씨 집안의 여식과 혼인했다. 그가 훗날의 효의왕후다. 그녀는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홍역을 앓는 바람에 얼굴이 살짝 얽었다. 그래서 여자로서 자신감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노론 집안의 여자였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이끈 것이 노론인 만큼 정조로서는 효의왕후를 대하는 심정이 복잡했을 것이다. 그래선지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훗날 효의왕후가 상상임신까지 할 정도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어딘가 늘 거리감이 존재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의왕후는 자신의 도리를 다했다. 친정식구들을 함부로 궐내에 들이거나 벼슬길에 나서게 하지 않았고, 정조의 후궁들과도 우애 있게 지냈다. 정조 역시 그녀를 정중하게 대접하고 동반자로 인정했다고 한다. 비록 한 여자로서 사랑해 주지는 못했지만.
정조가 죽은 후 혼자 남은 효의왕후는 평생을 조용히 근신하며 살다가 창경궁 자경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창경궁 곳곳에는 정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곳으로 알려진 문정전, 정조가 활쏘기 연습을 하던 정자, 그리고 정조가 사도세자를 모신 경모궁으로 가기 위해 나서던 문...
효의왕후는 창경궁을 거닐며 정조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효의왕후는 사후, 정조와 나란히 건릉에 묻혔다. 죽어서야 남편의 곁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어떤 관계가 되었을까?
결혼식이 열리는 이 잔디광장을 거닐며 혼백이나마 젊은 부부로 돌아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사실 정조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은 여인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수빈 박씨가 순조를 낳았을 때조차도 정조는 '아버지가 내게 아들을 주셨다'고 했을 정도니까. 어쩌면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꽉 차 있어 여인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한쪽에는 지지대비가 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돌아갈 때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였다는 미륵고개 이야기를 기념하기 위해 순조 7년(1807년), 화성 어사 신현(申絢)의 건의로 세운 비다.
일반적으로 순조는 아버지 정조만큼 대단한 위업을 남기지 못한 임금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는 정조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보위에 올랐다. 

정조가 즉위할 즈음도 노론의 세상이었지만 영조가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아놓고 떠난 상태였다. 그러나 순조는 겨우 11살의 나이에 왕이 되었고, 노론의 지주인 대비 정순왕후에게 국정의 주도권을 빼앗겼다. 게다가 정조의 개혁정치를 도왔던 남인세력은 완전히 축출된 상태였다.
기록을 살펴보면 순조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뜻을 이으려고 애를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뿌리 깊은 노론의 특권을 들어내기에는 그의 힘이 너무 부족했다. 

할아버지 사도세자와 아버지 정조의 뜻을 이어가지 못한 순조의 무력감이 얼마나 컸을까? 그래서 그는 화성행궁 근처에 '화령전'을 지어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지지대비를 세워 아버지를 향한 효심을 보이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효자군주, 애민군주 정조. 그를 생각하며 효행공원 안을 걷다 보면 우리 역시 발걸음이 느려진다. 우리 마음속에도 어느 새 지지대비 하나가 반듯하니 서 버린 것이다.

참고문헌_  <이산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김준혁 著  -여유당-
           <왕이 만든 시장> 브랜드스토리 著  -멋진세상-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김태형 著 -역사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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