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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진청 농업과학관, 그곳에 가면...
2012-04-13 10:46:56최종 업데이트 : 2012-04-13 10:46:56 작성자 :   e수원뉴스

"왜 서울대생이 수원으로 등교를 하나요?"
몇 년 전만 해도 서울농대생들이 심심찮게 받았던 질문들이다. 흔히 '서울대'라고 하면 관악산 캠퍼스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 농대만큼은 수원에 캠퍼스를 두고 있었다. 수원이 한국 농업의 중심지이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수원이 한국 농업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을까?
가장 눈에 띄는 이유는 한국농업을 책임지는 농촌진흥청이 수원에 있기 때문이다.

농촌진흥청은 그 뿌리를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수원의 농촌시범장에 두고 있다. 사실 일제가 이곳에 농업시험장을 만들 수 있었던 기반 역시 정조 때 이루어진 것이다.
수원을 경제자족도시로 키우려 한 정조가 제일 먼저 맞닥뜨린 난관은 '토질'이었다. 수원은 이름처럼 물이 풍부한 곳이다. 그러나 토질이 척박했다. 게다가 일부 지역은 소금기가 많아 농사를 짓기가 어려웠다.

정조는 거름을 만들어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한편 대형 저수지를 파고 물길을 내어 땅에 밴 소금기를 제거했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농법을 연구하고 개량하여 수확량을 올렸다. 바로 그 인연으로 수원은 한국농업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를 한눈에 보여 주는 곳이 바로 농업과학관이다. 

농진청 농업과학관, 그곳에 가면..._1
농업과학관

농업과학관은 서호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서호는 '축만제'로 더 유명하다. '만년 동안 만석의 풍년은 기원하는 제방'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정조 때 근처 농민들의 전답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정조가 만들었다. 바로 그 자리에 농업과학관이 들어서 있으니 각별한 인연이 느껴진다. 

농업과학관은 크게 '농업역사실', '현대농업실', '녹색기술관', '기획전시실', '전통농기구전시실', '농업과학관', '학습자료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미있게도 농업과학관은 2층부터 관람을 하도록 되어 있다. 농업 이전 인류의 생활사 모습을 담은 벽을 따라 걸어가면 2층의 현대농업실과 농업역사실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는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한 각종 농업과학 기술을 소개하고 있다. 농촌진흥청 근무자의 70%가 연구인력이라고 한다. 그만큼 농업과학에 대한 우리 정부의 관심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전국 농업토양 전자지도다. 전국의 토질을 분석하여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한 것인데 이를 기초로 재배하기에 적합한 작물, 재배방법 등을 고려할 수 있다. 한평생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던 어진 임금 정조가 이 지도를 보았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오늘날 한국의 40대 이상이라면 '일반미'와 '정부미'를 구분할 것이다. 일반미는 말 그대로 농가에서 그해에 거둔 쌀이다. 정부미는 그 전해에 정부가 구입한 농가의 쌀을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선하고 찰진 일반미에 비해 묵은 쌀인 정부미는 냄새가 나고 맛이 떨어졌다. 그래도 저렴하기 때문에 이 정부미는 오랫동안 우리 서민들의 밥상을 지켜 왔다.  

지난 가을에 거둔 쌀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익기 전. 하도 먹을 것이 없어서 풀뿌리를 캐어먹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던 시기. 그때를 우리는 보릿고개라 불렀다.  이 보릿고개를 없애기 위해 농촌진흥청이 매진한 것이 벼 품종 개량연구였다. 병충해에 강하고 쌀알이 많이 열리는 벼가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통일벼'.
오늘날의 쌀에 비하면 맛이 많이 떨어졌지만 당시 통일벼는 보릿고개를 없애는 데 일등공신이었다. 뿐인가. 이 통일벼 두 가마니를 팔면 자식들의 대학등록금을 마련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쌀은 단순한 곡식이 아니었다. 생존이자 미래의 꿈, 그리고 사랑의 상징이었다. 

고도성장기를 거치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쌀도 차츰 양에서 질과 맛을 중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이곳에 전시된 벼 표본들을 보고 있으면 한국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서서 고도성장기를 거치고, 외환위기를 겪고 다시 이를 극복하며 걸어온 우리나라의 역사가 떠오른다. 벼가 말해 주는 한국의 현대사라고 할까?

쌀과 더불어 소와 돼지, 닭 역시 우리 농촌을 지탱시키는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농업기계화가 이루어지기 전, 소는 농촌 사람들의 전부였다. 돼지 역시 소중한 자금원이 되어 주었다. 경제수준이 높아지고 고기 수요가 높아지면서 소와 돼지, 닭은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여기까지가 농업의 영역인 것 같았다.

농진청 농업과학관, 그곳에 가면..._2
농진청 농업과학관, 그곳에 가면..._2

그러나 이제 농업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제 소와 돼지 같은 가금류는 단순히 노동력이나 단백질 공급원일 뿐만 아니라 바이오 장기산업의 중요자원으로 부상하고 있다. 
바이오 장기란 생명공학을 응용한 인공장기 활용기술이다. 기능을 잃은 인간의 조직과 장기를 복원·재생·대체하기 위해 다른 동물의 세포와 장기를 개발한 뒤 이를 인간 체내에 이식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바이오 장기는 난치병 등 각종 인간 질환 해결을 위한 차세대 생명공학의 핵심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이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 돼지다. 돼지는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유사하고 장기의 크기도 비슷하다. 그래서 바이오 장기 생산에 최적의 동물로 평가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실크를 이용해 인공뼈를 만드는 기술까지 발전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농업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산업이라는 통념을 뛰어넘어 생명과학으로 발돋움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산업도 마찬가지지만 농업이야말로 사람의 땀과 진심이 필요한 산업이다. 그래서 농업과학관에는 녹색명예의 전당이 있다. 한국 농업에 큰 공로를 세운 각 분야의 인물들을 선정해 사진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우선 전이유전자를 이용한 세계 최대 벼 게놈 연구 기반을 구축한 공로를 세운 박동수 박사가 최고의 연구원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국내 최초로 한우 HACCP 인증 기술지도로 인정받은 김태우 씨가 최고 지도자로, 4H활동과 농업기술센터 교육과정을 통해 최고농업기술을 습득한 이윤현 씨가 농업기술명인으로 선정되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우리의 먹거리는 이런 공로자들의 땀과 정성 속에서 보호되고 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기 일에 몰입하고 침잠하는 우직함. 녹색명예의 전당 앞에 서면 그 우직함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체험마당으로 나오면 맷돌과 절구가 반겨 준다. 옛날 농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맷돌과 절구. 그러나 지금은 믹서와 분쇄기에 그 자리를 내주고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는 직접 맷돌을 돌려보고 절구질을 해볼 수 있다. 특히 단순히 맷돌을 돌리기만 할 뿐 아니라 직접 콩을 넣고 마음껏 맷돌을 돌려 갈아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다. 

맷돌과 절구는 자연스럽게 '좋은 날'과 이미지가 겹친다. 잔칫날이 되면 집안 여자 어른들은 맷돌에 녹두를 갈아 빈대떡을 부치고, 절구로 떡방아를 찧었다. 그래서 맷돌이 돌고 절구 소리가 들리는 날은 괜히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난다. 맷돌을 돌리고 절구질을 하다 보면 어머니의 모습이, 그리고 고향의 모습이 스쳐가며 콧날이 시큰해진다. 역시 농촌은, 영원한 우리들의 고향이다.

다양한 콘텐츠를 전시하고 있어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견학코스로 손꼽히는 농업과학관. 그러나 요즘은 어딘가 활기가 없어 보인다.
사실 서울농대가 이곳을 떠나면서부터 낙조는 시작되었다. 게다가 2014년에는 농촌진흥청마저 수원을 떠나 완주로 간다. 물이 없어 멈춰선 물레방아가 마치 지금의 농업과학관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쓸쓸해져 온다.

농진청 농업과학관, 그곳에 가면...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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