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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왕-최치원-태조왕건이 사랑한 광교산
2012-04-27 10:53:57최종 업데이트 : 2012-04-27 10:53:57 작성자 :   e수원뉴스

온조왕-최치원-태조왕건이 사랑한 광교산_1
광교산


수원 토박이가 아닌 사람들에게 '수원의 주산'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부분 '팔달산'이라고 대답한다. 팔달공원, 팔달문 등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다가 시가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원의 주산은 광교산(光敎山)이다.

광교산은 수원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그래서 맑은 날 광교산 정상에 오르면 동쪽으로는 여주와 이천, 서쪽으로 경기만의 서해 5도, 남쪽으로는 용인, 평택, 안성이 보인다.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서울의 북한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또한 광교산은 수원 사람들에게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임산자원이 풍부해 옛날부터 이 부근 주민들의 땔감 공급원이었다. 산나물 종류도 많아 사시사철 산나물을 캐러 온 여인들로 북적였다.
광교산에서 발원한 물은 계곡을 타고 흘러 정조가 백성들을 위해 만든 만석거와 서호로 흘러들어갔다. 정조가 만든 국영농장 대유둔의 황금색 벼도, 정조의 명으로 심은 서호의 뽕나무들도 모두 이 광교산의 물이 키운 것이다. 그러니 광교산은 수원의 젖줄인 셈이다.

백제 온조왕과 광교산

광교산에는 '우성위보(禹成尉洑)', '우성위평(禹成尉坪)', '우평(禹坪)'이라 불리는 지역이 있다. 여기에는 백제를 세운 온조의 이야기가 서려 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온조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소서노의 아들이다. 하지만 주몽의 친아들은 아니었다. 어머니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하기 전에 이미 전남편 우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는 주몽이 고향에 두고 온 아들 유리를 차기 왕으로 지목하자 미련 없이 남하해 새 나라 백제를 세운다. 그리고 제일 먼저 아버지 주몽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렸다.
인간적으로 야속하게 느껴졌을 아버지인데 온조는 달랐다. 이복형 유리와 싸우는 대신 남하해 새 나라를 건설하는 호방한 대인배 기질과 개척자 정신의 소유자였다. 아마 그 기질이 있었기에 낯선 땅에서 새 나라를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온조 역시 다정한 아버지였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딸이 있었다.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온조는 딸과 사위 우성위(禹成尉)를 이곳에 보내 살게 했다.  아마 온조는 전략적 요충지인 이곳에 친위세력을 두어 방비를 튼튼히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성위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계곡에 흐르는 물을 막아 도랑을 만들고 보를 막았다.
그런데 정작 딸을 이렇게 외진 곳으로 보내놓고 나니 미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너무나 딸이 그리웠다. 그래서 온조는 걸핏하면 딸과 사위를 보러 이곳으로 행차했다. 

장인 온조와 뜻이 잘 통했던 사위 우성위는 아예 이곳에 행전(行殿)을 지어 장인이 편안하게 머물다 가도록 배려했다. 또한 왕이 먹는 우물인 '정자산 고정(亭子山 古井)'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우물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어쨌든 광교산 줄기에서 나는 물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은 그대로 흘러 수원의 만석거로, 서호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니 결국 수원 사람들은 임금과 같은 물을 마시고 사는 셈이다.

아무튼 광교산의 물로 목을 축이던 온조는 백제를 더욱더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갔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고구려의 거듭되는 공격으로 백제는 한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천도한다. 그리고 웅진백제시기, 무령왕의 치세 아래서 전성기를 누리지만 사비로 천도한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나당연합군에 손에 멸망하고 만다.

천재 최치원과 광교산

광교산에는 '종대봉(鐘臺峰)'이라는 이름의 봉우리가 있다. 오랜 옛날, 이 봉우리 꼭대기에는 이름처럼 종을 매달아 놓은 종루가 있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말기, 초라한 행색의 한 노인이 이 종루를 찾아왔다. 옷은 허름하지만 형형한 눈빛이 범상치 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통일신라 말기 멀리 당나라까지 문명(文名)을 떨쳤던 천재 최치원이었다. 
뛰어난 재능과 애국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출사 길은 험난했다. 

신라는 뿌리 깊은 신분제 사회였다. 왕족인 성골, 그 아래 진골을 비롯해 출신에 따라 1두품에서 6두품까지 신분이 나뉘어 있었다. 각 품계는 승진할 수 있는 벼슬이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일정 이상의 출세가 어려웠던 것이다.
최치원은 6두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신라 사회에서 6두품이 가진 한계를 알고 어린 최치원을 당나라로 유학 보냈다.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최치원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조국 신라에 대한 그리움과 염려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당시 신라는 귀족들의 부패와 호족세력들의 반란으로 왕권이 흔들리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돌아가 내 나라를 구하는 일부터 하자. 그것이 선비의 도리다.'
하지만 청운의 꿈을 안고 찾아온 신라에서 그는 뼈아픈 좌절을 겪었다.
"어디 감히 6두품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려 한단 말인가!"

최치원이 제안한 개혁정책안은 귀족들에 의해 번번이 거부당했다. 뿐만 아니라 기득권은 조직적으로 그의 출사 길을 막기 시작했다. 결국 최치원은 출사의 꿈을 접고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최치원은 종루에 매달린 종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 높은 곳에 왜 이런 종이 달려 있을까? 종이라면 사람 많은 곳에서 시간과 위험을 알려 주는 물건이거늘, 이 산속에서 누가 이 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까? 오직 바람만이 건드리고 지날 뿐인데.... 여기서 아무리 울려 봐야 세상 누가 이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아, 어쩌면 이리도 내 신세와 닮았는지...'
그는 깊은 산속에 매달린 종이 마치 세상에서 배척당한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종루에 서서 서쪽을 바라보니 서해가 눈에 들어왔다.

온조왕-최치원-태조왕건이 사랑한 광교산_2
광교산에서 바라본 수원시가지 일부

'저 바다만 건너면 당나라구나.'
최치원은 당나라가 그리웠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국제도시였다. 피부색과 눈빛이 다른 다양한 인종이 스스럼없이 어울려 교역을 했다. 더구나 외국인들이 당나라 정계에 진출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최치원 자신, 신라인이면서도 당나라 황제의 측근으로 활약하지 않았던가!
"아, 발전하는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베푼다. 모든 사람에게 문을 연다. 폐쇄적인 나라, 차별하는 나라는 발전할 수 없다. 당나라는 저렇게 눈부시게 성장해 가는데 내 조국 신라는 어찌 한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갈 수도 있었다. 그곳에는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그의 재주를 아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최치원은 고개를 저었다.
"선비이기 이전에 나는 신라인이다. 조국이 나를 버려도 내가 조국을 버릴 수는 없다. 이렇게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후학들을 양성하자. 그리하여 스러져가는 신라를 다시 세울 수 있는 동량들을 만들자."
그 결심대로 최치원은 은거생활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제자들을 길러냈다.
종대봉. 그러나 지금은 종루도 종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봉우리에 기대어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 최치원의 마음이 느껴진다. 넓은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고난의 은거를 택한 최치원. 그의 아픔이 다가온다.

최치원의 흔적은 '문암(文巖)'이라는 바위에도 남아 있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산천을 주유하며 은거생활을 했던 최치원은 이곳 문암에도 자주 들렀다고 한다. 아마도 당시 유명한 문인이었던 그가 이곳에서 명시를 많이 썼기에 붙은 이름인지도 모른다. 

온조왕-최치원-태조왕건이 사랑한 광교산_3
문암이 있는 문암골의 가을

어려운 때 정좌한 채 장부 못 됨을 한탄하나니
나쁜 세상 만난 걸 어찌하겠소.
모두들 봄 꾀꼬리의 고운 소리만 사랑하고
가을 매 거친 영혼은 싫어들 하오.
세파 속을 헤매면 웃음거리 될 뿐
곧은 길 가려거든 어리석어야 하지요.
장한 뜻 세운들 어디에 말하고
세상 사람 상대해서 무엇 하겠소.

최치원의 시 '곧은 길 가려거든'이다. 곧은 길을 가려거든 어리석어야 한다. 언뜻 들으면 이 시는 자조적이고 냉소적이다. 그러나 다시 읽으면 최치원의 결심이 읽힌다. 어리석다고 할지언정 나의 길을 가겠다는.
어쩌면 문암에 앉아 시를 읊으며 최치원은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의 아버지 견일은 국제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일찍이 아들의 재능을 간파한 견일은 12살의 어린 최치원을 혈혈단신 당나라로 유학 보낸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조기유학을 보낸 셈이다. 어차피 엄격한 신분사회인 신라에서는 아들의 꿈을 펼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개방된 나라에서 입신하기를 바란 것이다.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 견일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생존여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오래 살아 최치원의 쓸쓸한 말년을 보았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지 짐작이 간다.
곧은 길 가려거든 어리석어야 하는 법.
일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최치원의 선택은 어리석었는지 모른다. 최치원 역시 자신을 위해 큰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죄송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당나라에서 중국인으로 살다가 생을 마쳤다면 우리의 문화사와 정치사는 얼마나 척박했을까?
그러고 보면 광교산은 아버지와 자식의 이야기가 짙게 드리워진 산이다. 멀리는 온조왕과 그 딸, 최치원과 견일, 그리고 정조와 사도세자......
긴 호흡으로 역사를 보며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 간 그들의 뒷모습이 크게 느껴진다. 너무 얄팍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부박하게 다가올 때면 문암에 앉아 최치원의 시를 읊조려 보기를.

고려태조 왕건과 광교산

그런데 광교산의 원래 이름은 광악산(光岳山)이었다. 그런데 언제 어떤 이유로 광교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때는 후삼국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왕건의 고려가 새로운 기세로 일어서고 있었다. 궁예의 후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낸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마저 물리치면서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광악산 행궁에서 정국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 높이 눈부신 광채가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흥분했다.
"저건 무슨 빛일까?"
"이 산이 원래 빛과 관계가 깊은 산이긴 하지. 광악산이라는 것 자체가 '빛나는 산'이라는 뜻이니 말이야."
"아냐! 저건 그냥 빛이 아니야. 부처님의 가르침이야!"

왕건은 독실한 불자였다. 또한 고려의 국교 역시 불교였다. 불교에서 '빛'은 '지혜', 부처'를 상징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정체모를 빛을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부처가 그 빛을 통해 주려고 한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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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 곳곳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사찰의 흔적

그것은 평화가 아니었을까? 국가와 왕실, 이념과 민족을 구분지으며 죽고 죽이는 전쟁이 끝나고 이제는 모두가 하나 되어 너나 구분 없이 함께 살자는 평화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가르침은 조선의 정조시대를 지나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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