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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장인이 수원에 잠들어 있다
팔달구 이의동 산 13-10번지 심온선생 묘
2012-05-04 13:06:58최종 업데이트 : 2012-05-04 13:06:58 작성자 :   e수원뉴스

세종대왕의 장인이 수원에 잠들어 있다  _1
세종대왕의 장인이 수원에 잠들어 있다 _1

광교산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정갈한 무덤과 신도비각이 보인다. 해묵은 비석과 문인석이 지키고 있는 이 무덤의 주인은 심온(沈溫). 그는 조선의 전성기를 이끈 세종대왕의 장인이다. 

1418년, 수원 사람들은 너도나도 거리로 몰려나왔다. 화려한 사신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투박한 얼굴의 농부가 젊은 선비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선달님. 이게 무슨 행렬이오?"
"사은사(謝恩使)행렬이오."
"사은사? 그게 뭐요? 무슨 절 이름 같은데?"
"이번에 우리 조선에 새 임금님이 오르셨다고 명나라에 보고하러 가는데 그 사신들을 사은사라고 한다오."
"잉? 아니, 그럼 전까지 계시던 임금님이 돌아가셨소? 난 임금님 돌아가셨다는 소식 못 들었는데...."
"아니, 뭐 꼭 앞의 임금님이 돌아가셔야 새 임금이 오르시나? 한동안 대궐에 임금님이 세 분이나 계시지 않았나요?"
"하기야."

이성계와 뜻을 같이한 조선 창업 공신이었지만

조선 초기, 정국은 복잡했다. 왕자의 난을 통해 권력을 잡은 태종 이방원은 허수아비 임금인 형 정종과 아버지 태조를 제치고 명실공히 조선의 실제적인 임금이 되었다. 게다가 그는 첫째아들 양녕대군의 자질을 문제 삼아 폐세자 시키고 가장 총명한 셋째아들 충녕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1418년, 양위선언을 하여 충녕대군을 보위에 앉게 하니 그가 조선 4대 임금 세종이다.
그리고 이제 새 임금 세종의 장인 심온이 사은사를 이끌고 명나라로 가는 것이다.  

"아이고, 저것 봐. 말에 타신 저 분이 심온 대감이신가 보네."
"그래. 대단하시네. 임금님의 장인이라니 말이야."
"정말 거칠 것이 없으시겠네."
고려 말에 태어난 심온은 일찍이 이성계와 뜻을 같이한 조선 창업 공신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 그는 승승장구했다. 한성부판윤을 비롯하여 형조판서, 호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에 오르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특히 태종이 가장 총애하는 왕자 충녕대군이 사위가 되면서 아무도 그의 자리를 넘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심온(沈溫)이라는 이름처럼 깊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모든 일을 공평무사하게 처리했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태종이 굳이 심온의 여식을 며느리로 삼은 것도 심온의 곧은 성품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임금의 장인이 된 이 순간에도 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몰려드는 백성들을 어진 얼굴로 바라보고 간간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저런 분의 여식이라면 우리 중전마마도 참 좋은 국모가 되시겠네."
"그러게 말이야. 우리의 복, 나라의 복일세."

세종대왕의 장인이 수원에 잠들어 있다  _2
세종대왕의 장인이 수원에 잠들어 있다 _2

그런데 몇 달 후 수원 사람들은 충격적인 행렬을 목도했다. 지난번에 사은사로 가던 행렬은 맞는데 행색과 분위기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무엇보다 수원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심온의 변화였다. 화려한 관복을 입고 사모관대를 쓰고 말에 탔던 그가 이번에는 상투가 풀어진 채 죄인호송용 수레에 타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심온 대감이잖아. 이게 무슨 일이래? 명나라에 가신 일이 잘 못 되셨나?"
"잘못되시긴! 명나라 황제가 아주 기뻐하셨다는데!"
"글쎄, 저 분이 역모를 꾀했대. 그래서 전하께서 사형에 처하라고 하셨다는데."
"전하? 어느 전하? 상왕 전하? 아니면 이번에 보위에 오르신 전하?"
"아, 그야 이번에 즉위한 전하시지."
"가만! 그러면 사위가 장인을 처형시킨단 말이야?"
"역모를 꾀했다잖아. 반역자잖아."
"자넨 바보인가? 자기 사위를 죽이려고 드는 장인이 어디 있어? 게다가 임금을!"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 그러나 심온으로서는 충분히 예견하고 있던 일이었다.
명나라에서 사은사 역할을 잘 수행하고 돌아오던 심온은 의주에서 난데없는 일을 당했다.
"역모를 꾀한 죄인 심온은 어명을 받으시오."
그의 죄목은 간단했다. 반역.
그러나 사위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사돈에 대한 반역이었다. 즉, 태종이 상왕 노릇을 하며 세종의 국정에 간섭하는 것을 못마땅해 한 심온이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었다.

관리가 보인 문서에는 명백한 관인이 찍혀 있었다. 사위 세종의 관인이 찍힌 죽음의 문서!
그러나 심온은 알고 있었다. 이 관인을 찍은 것이 사위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상왕인 태종의 뜻이라는 것을! 만약 사위가 이 문서에 관인을 찍지 않았다면 태종은 다시 임금을 갈아치울 수도 있는 사람임을!
'상왕 전하는 무서운 분이시다. 자신의 길을 막는 사람은 거침없이 처단하셨다.'

심온은 정치에 간섭하는 자신의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가차없이 처형한 태종의 성벽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와도 권력을 나누지 않겠다는 태종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 준 일이었다. 그래서 심온은 평소에도 늘 근신하는 자세로 살았다.
'하지만 더는 피할 길이 없구나. 내 선택은 오직 하나 뿐.'

상왕 태종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다

그는 딸과 사위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이 죽지 않으면 딸과 사위가 위태로웠다.
결국 수원에 도착한 그날 밤, 심온은 자결하고 말았다. 자신의 죽음으로 딸과 사위, 그리고 외손자들의 안녕을 보장받기를 원하면서! 

세종대왕의 장인이 수원에 잠들어 있다  _3
세종대왕의 장인이 수원에 잠들어 있다 _3

하지만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역적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심온의 아내와 딸들은 관비로 전락했다.
그래도 태종은 만족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세종더러 심온의 여식과 이혼할 것을 명령했다. 그 아비가 역모 죄로 죽었으니 그 딸이 국모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런데 이번에는 세종도 더 물러서지 않았다. 자기 손으로 장인을 사형시키는 문서와 장모와 처형을 관비로 만드는 문서에 관인을 찍은 세종은 처가에 더는 죄를 지을 수 없었다. 

"중전은 장차 보위를 이을 원손을 낳았습니다. 원손을 낳은 처를 내치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옛 성인들도 조강지처를 홀대해서는 아니 된다 하였사옵니다."
당시 허약한 입지에 서 있던 세종으로서는 왕위는 물론 목숨까지 건 반항이었다.
평소 자신의 뜻을 잘 따르던 세종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태종도 더는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며느리를 내치라는 명령을 거두어 들였고, 중전은 무사할 수 있었다. 

세종은 마지막 날까지 중전을 존중하고 사랑하였다. 또한 훗날 그는 장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그의 신원을 복원했다. 그것이 비참하게 죽은 장인에게 조금이라도 잘못을 비는 길이라 믿었기에.
뒤늦게나마 명예회복이 되었기에 심온은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원 광교산 자락에 이렇게나마 마지막 보금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의 묘비문은 세종의 아들이자 심온의 손자인 안평대군의 작품이다. 

광교산 자락에 묘..비문은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의 작품

공교롭게도 이 묘비문을 쓴 안평대군은 세종의 아들이다. 
글 솜씨가 뛰어나고 인품이 후덕했던 그는 정치적 야망이나 세속적인 욕심이 없었다. 그저 글 쓰고 그림 그리고 풍류를 즐기며 조용히 한생을 살기로 한 종친이었다. 아마도 살아 있었다면 외할아버지 심온과 가장 마음이 잘 맞았을 손자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아버지 세종이 죽고 그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병약한 큰형 문종마저 요절하면서 비극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문종의 뒤를 이어 어린 임금 단종이 즉위하자 문종의 아우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에 욕심을 낸 것이다.
천하의 모사꾼 한명회와 손을 잡은 수양대군은 그들의 계획에 방해가 될 만한 종친들부터 처단하기 시작했다. 그 살생부에는 끝까지 단종을 지키려 한 금성대군, 그리고 욕심 없는 안평대군도 들어 있었다. 

심온과 안평대군. 두 사람은 참으로 많이 닮았다. 두 사람 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고, 후덕하고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자기 의지와는 다르게 가족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사돈과 사위의 손에, 그리고 형의 손에. 

딸이 왕비가 되자 자결을 해야 했던 기구한 외할아버지의 묘비를, 조카를 지키려 하다가 형의 손에 죽은 슬픈 외손자가 썼다. 그 인연을 생각하며 묘비를 보고 있으면 인간의 욕망, 권력의 속성, 그리고 운명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세종대왕의 장인이 수원에 잠들어 있다  _4
세종대왕의 장인이 수원에 잠들어 있다 _4

묘역에서 1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있는 신도비는 영조 13년인 1737년에 건립되었다.
수원에 자주 행차했던 정조도 심온의 이 묘역에 와 본 적이 있을까?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목도한 정조 역시 심온의 죽음에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저 지나치면 해묵은 묘역. 그러나 이 자리에 누운 심온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이 조용한 묘역이 다르게 보인다. 일세를 풍미한 인재! 권력의 정점에 서 본 남아!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그저 가장 다정하고 희생적인 아버지였던 한 사나이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여기 함께 누워 있다.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산 13-10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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