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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박물관에서 화성건설의 역사를 만난다
2012-05-25 14:17:06최종 업데이트 : 2012-05-25 14:17:06 작성자 :   e수원뉴스

화성박물관에서 화성건설의 역사를 만난다 _1
화성박물관에서 화성건설의 역사를 만난다 _1

정조는 수원을 제2의 한양으로 만들려 했다. 그래서 한양의 종로처럼 화성행궁 앞에 종각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곳은 자연스럽게 '종로'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수원시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행사는 대체로 이 종로를 중심으로 거행된다. 특히 특별한 행사 때는 종각의 종을 울리기도 한다.

역사적 사건들과 유물들을 일목요연하게 전시

이 종로를 지나 수원천을 건너 내려오면 화성박물관이 보인다.
이곳은 오직 수원 화성만을 위한 공간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을 통해 정조시대의 문학과 건축공학의 우수성, 그리고 선진정치문화를 소개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세워진 박물관이다.
따라서 이곳에는 정조와 그 총신들, 그리고 화성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들과 유물들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특색 있는 것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화성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중심 사건들을 인형으로 구현해 놓았다는 것이다.

정조는 실학자 정약용에게 화성 설계를 맡겼다. 정약용은 여러나라의 성곽을 연구하여 조선의 현실에 가장 잘 맞는 새로운 형태의 성곽을 설계했다. 그래서 화성을 '성곽의 꽃'이라고 부른다. 특히 정약용은 도르래의 원리를 활용한 거중기를 발명하여 공사 기간과 경비를 크게 줄였다. 무엇보다 공사현장에서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는 진기록을 세웠다. 

화성박물관에서 화성건설의 역사를 만난다 _3
화성박물관에서 화성건설의 역사를 만난다 _3

또 정조는 화성을 축조하는 데 있어서 행여라도 수원 주민들에게 불편이 가지 않도록 깊이 배려했다.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을 만들 때는 백성들의 집을 허물지 않도록 장안문의 위치를 바꾸기까지 했다.
최첨단 기계와 애민의 마음이 모두 동원된 수원 화성 축성을 구현한 작품 앞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공사하는 소리, 서로 부르는 소리,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1795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의 진찬연을 열기 위해 화성행궁을 방문한다. 한양에도 멀쩡한 정궁이 있는데 하필 겨울비 내리는 궂은 날씨를 무릅쓰고 수원까지 내려가는 것에 대해 분명 반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가 굳이 어머니의 회갑연을 수원에서 열기로 한 것은 그곳이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곳이기 때문이었고, 그곳이 바로 자신이 꿈꾸는 이상국가를 건설할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이날 행차 때 정조는 곤룡포나 융복 대신 황금갑옷을 입었다. 그리고 화성의 북쪽문인 장안문으로 들어섰다. 그의 곁에는 국왕 호위부대인 장용영 용사들이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보무도 당당하게 장안문을 통과한 것은 임금을 능멸하고 백성을 억압하는 권문세가들에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어버이로 향한 효심처럼 백성을 사랑했던 임금 정조

1795년,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의 진찬연이 열렸다. 봉수당(奉壽堂)의 봉수(奉壽)는 '장수를 기원한다'는 의미다.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비는 정조의 마음이 담겨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사실 정조는 이곳을 봉수전으로 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당'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봉수당이라고 이름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혜경궁이 사도세자의 요절로 중전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혜경궁과 사도세자는 동갑이다. 정조가 굳이 겨울비를 맞으며 수원까지 행차해 진찬연을 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는 이 잔치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혼백이라도 함께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 마음을 생각하며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애잔한 마음이 일어난다. 

어머니의 진찬연을 열고 난 뒤 정조는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에서 솥을 걸어놓고 죽을 쑤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했다. 그리고 병사를 시켜 죽을 한 그릇 가져오게 한 후 맛을 보고는 이렇게 당부했다.
"혹시 늦게 도착하는 백성들이 식은 죽을 먹는 일이 없도록 정성을 다하여라. 지금 내가 먹은 이 죽처럼 진해야 하느니라. 절대 묽은 죽을 먹여서는 아니 되느니라."
그리고 늦도록 신풍루에 올라서, 죽을 먹는 백성들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이런 임금과 함께했다는 것은 조선의 영원한 기쁨이 아닐까?

영조와 정조 시대에는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이 잦아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었다. 하늘만 백성을 괴롭히는 게 아니었다. 탐욕스런 지주들은 소작농을 착취하여 제 배 불리기에 바빴다.
그래서 정조는 수원에 거대한 저수지 '만석거'를 만들고 그 옆에 최초의 국영농장인 '대유둔'을 열었다. 그리고 수원사람들 중 땅 없는 사람들에게 농장의 땅을 임대해 주고 농사를 짓게 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국가에는 30을 바치고 나머지 70은 백성이 가져가게 했다. 이렇게 되자 누구나 신이 나서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대유둔은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특히 가을날, 드넓은 대유둔 들판에서 흔들리는 황금빛 곡식이 만드는 아름다운 경치는 수원팔경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했다. 

정조의 상공업 진흥무대 수원 화성 

정조는 농업만으로는 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루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상공업을 진흥하고자 애썼는데 수원이 바로 그 시험무대가 되었다. 팔달문 앞에 시장을 열고 장사를 원하는 백성들에게 무이자로 사업비를 빌려 주어 가게를 열게 해 준 것이다.
이 때문에 '수원에서는 두 집 건너 한 집은 가게'라는 우스갯소리가 돌 지경이었다. 그래서 타 지역 사람들은 수원사람을 일러  '수원 가가쟁이'라고 불렀다. '가가'는 '가게'의 고어다. 즉 '가가쟁이'는 '가게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수원 가가쟁이'라는 말이 변해 '수원 깍쟁이'가 되었다. 

이외에도 화성박물관에는 중요한 역사자료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화성 행차 때 정조가 입었던 황금갑옷, 화성 축성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정조의 문집인 '홍제전서', 심지어 수원유수 조심태에게 보낸 정조의 비밀편지까지 있다. 

화성박물관에서 화성건설의 역사를 만난다 _2
화성박물관에서 화성건설의 역사를 만난다 _2

이렇게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춘 전시물들을 보고 나오면 화성박물관 앞마당에서 반가운 유산을 하나 만나게 된다. 바로 정조의 태실이다. 

이외에도 거중기와 녹로를 비롯, 화성축성에 사용된 기계들을 볼 수 있다.
화성박물관은 화성만을 소개하는 곳이 아니다. 사실은 화성을 통해 정조의 애민사상, 개혁의지를 널리 알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자랑스러운 수원시민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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