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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시작이자 추억의 보고였던 수원역 주변 평동
40년전부터 정들기 시작한 이 도시 떠날 수 없어
2021-08-31 10:39:48최종 업데이트 : 2021-09-01 10:20:51 작성자 : 시민기자   김청극
이목리 삼풍가든 근교에서의 한가한 즐김

이목리 삼풍가든 근교에서의 한가한 즐김


수원시는 250년 전 정조의 효 사상과 애민정신이 깃들인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이다. 수원시가 시로 승격된 지 벌써 72주년을 맞아 이제 100년의 기념을 앞두고 더욱 사람살기 좋은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내년에는 특례시가 되어 새로운 비젼으로 시민들의 기대 속에 사람 중심의 도시화가 가속될 것이다. 2021년 6월 국가통계 포털 데이터에 의하면 수원시 인구는 1,184,210명으로 경기도 인구 1,347만명 가운데 8.8%가 수원에 살고 있다.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에 이어 세 번째 큰 도시이다.


수원 북문 화서공원에서의 두 아들과 큰 조카

수원북문 화서공원에서의 두 아들과 큰 조카


이처럼 수원시 인구가 매년 급속히 증가하는 이유는 생활하기에 좋은 도시의 인프라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살기 좋았던 수원, 40년 전으로 돌아가 그때의 수원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필자가 수원에 첫 발을 딛고 살기 시작할 때는 수원시는 전형적인 농촌 그 모습이었다. 수원의 중심인 팔달문을 조금만 비껴가면 논과 밭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특히 논이 많았다. 수원역에서 북쪽으로의 철도길 옆으로 가지런하게 정돈된 논밭을 보며 농촌진흥청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때는 경기도의 도청 소재지는 수원이 아니라 인천이었기에 도청 일을 보려면 인천으로 가야 했다. 경기도의 생활권은 인천이지 수원이 아니었다.
 
필자의 고향이 인천이었기에 수원에 올 특별한 이유가 많지 않았다. 여기에 교통이 그리 원활하지 않았다. 그 당시 수인선 좁은 철도는 그런대로 낭만이 깃들어 있었고 주로 영세한 상인들이 많이 이용하기도 했다. 수원에서 여주까지의 협객열차와 다시 인천으로 가는 열차는 가장 안전하고 값싼 운송수단이었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속도가 더뎌도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수원역의 철도는 우리나라 서울방향과 남쪽의 대전 방향으로 남북을 가로 지르는 주요한 사람들의 이동수단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수원역에서 기차가 출발할 때 매큼한 연기를 뿜으며 빽소리를 내고 출발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평동주변 다소 삭막한 곳에서의 사촌동생과의 촬영

평동주변 다소 삭막한 곳에서의 사촌동생과의 촬영



수원에 정착하기 시작한 계기는 수원 댁을 아내로 맞이한 이유이다. 수원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색동이 처가인데 수원에서의 첫 살림은 그 곳에서 가까운 평동에서 였다. 당시에 아파트는 구경할 수도 없고 그래도 나은 연립주택에서의 수원 사람으로서의 생활은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다. 평동과 수원역간의 교통이 불편은 했어도 직장관계로 도보로 수원역이나 버스터미널(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한 상태임)을 이용할 수 있었다. 도로가 너무 안 좋아 비가 조금만 오면 신발은 엉망이고 지금의 세평 지하도를 도보로 다닐 수 없고 택시조차 평동 방향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사들은 포기할 정도였다. 잘못 택시가 평동 방향으로 들어 갔다가 물이 불어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기에는 지하차도에 물이 넘쳐 도저히 차량의 왕래가 불가능했다. 그저 버스정도 그것도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한 채 드문드문 다니는 정도였다. 지금은 없어진 지하차도를 도보로 이용했는데 지하도에는 그 흔한 전등조차 설치되지 않아 혼자 다니기에는 썰렁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평동은 수원역에서 거리가 가깝기는 하지만 남쪽,북쪽을 통하는 기차소리에 24시간 시끄러워 사람살기에 그리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집값이 쌀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원역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교통요지였고 주변의 역전시장(순대국집 등)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사람 냄새가 나고 서민들의 삶의 향기가 넘치는 곳은 수원역 주변이었다. 평동 주변의 구경거리나 관광, 아이들과 즐길만한 곳이 전혀 없어 버스를 타고 남문 근처의 팔달산이나 조금 먼 곳인 원천유원지가 수원 최고의 관광유원지였다. 그러나 사는 것에 바빠 시간을 내어 원천유원지가 좋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가 본 횟수가 손꼽을 정도였다.

 
이목리 산속에서 가까운 동네 친지들과 함께

이목리 산속에서 가까운 동네 친지들과 함께



사람들은 보통 수원은 선택받은 땅이라고 이야기했다. 우선 물이 풍부해서 가뭄이라는 것을 몰랐다. 거기에 비가 많이 와도 수원지역의 홍수가 났다는 말을 수원에서 살면서 들어 본적이 없다. 수원에는 그때만 해도 서호 저수지, 만석공원의 저수지, 원천저수지(광교저수지) 등에는 제법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딸기밭으로 유명한 푸른지대(지금의 서울대 수목원 근처)는 더 없는 수원의 휴식터였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점점 수원지리에 익숙해져 가까운 이목리의 삼풍 농원이나 가까운 냇가를 찾아 하루 놀러 가는 일이 생겨났다.


고색동에 잠시 살았을 때 문앞에서의 필자

고색동에 잠시 살았을때 문앞에서의 필자



필자는 지금은 영통의 망포동에 살고 있지만 이곳이 그때는 화성군으로 수원시와는 거리가 멀었고 특히 영통 일대는 논밭 등 전형적인 전원의 모습이었다. 40년 전을 회상하며 추억이 어린 곳이 있고 삶의 순박함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질 않는다. 그러한 정겨움 때문에 수원살이가 40년을 넘어 이제는 수원이 떠나기가 어려운 고향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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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동과고색동, 평동, 원천유원지, 팔달산, 매산시장, 김청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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