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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특집】 佛참전기념비와 英연방참전기념비
구 가이사고등학교, 첫 전사자 가이사 하사 이름 붙여 추모…전쟁터에서 싹튼 감동 휴머니즘
2019-06-22 09:38:40최종 업데이트 : 2019-07-01 09:45:38 작성자 : 시민기자   김청극
1967년에 세워진 가평읍에 있는 영연방참전비

1967년에 세워진 가평읍에 있는 영연방참전비


6일은 현충일로 오전10시 충혼탑에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얼을 기리고 추모하는 현충일 추념식을 가졌다. 이제 25일은 6.25전쟁 발발 69주년을 맞는다. 그러고 보니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고 국가를 깊이 생각하는 뜻 깊은 달이기도 하다. 1950년에 발발해 약 3년 간 지속돼온 한국전쟁으로 온 국토는 폐허가 됐고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도움을 잊을 수가 없다.

수원시에는 프랑스 참전 기념비가 지지대 고개에 세워져 있다. 1974년에 세워진 것이다. 참전 기념비에는 3400여 명이 참전하여 270명이 사망하고 1100명이 부상당했다고 기록돼 있다. 전쟁으로 희생된 국군과 외국군의 희생 참전비가 수원을 비롯해서 전국 곳곳에 세워져 있다.

경기도 가평에는 1967년에 세워진 영연방참전기념비가 있다. 가평전투는 유명한 전투 중의하나이다. 1951년 4월23일부터 25일까지 불과 3일간이긴 하지만 가평북방 7㎞지점에서 중공군과 만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사창리를 돌파한 중공군은 가평방면으로 진출하여 경춘가도를 차단했다. 중국인민지원군(제118사단)은 가평에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로 구성된 영국연방군(제27여단)과 맞붙어 전투를 벌이다가 4월25일 가평북쪽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전사자는 영국군 930명을 비롯하여 1797명이었고 부상자는 영국군 2674명을 포함하여 5229명이나 됐다.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 패트리샤 왕비, 캐나다 경보병대 제2대대가 전방 방호의 임무를 맡았으며 뉴질랜드 왕립 포병여단이 이들을 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가평에는 1952년 미40사단이 주둔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포화로 자욱한 전쟁터에서 기이한 장면을 목격한다. 멀리 포성이 끊이지 않는 전쟁터, 하루가 멀다 하고 산으로 방공호로 숨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어른들은 아이들을 위해 천막학교를 세우고 공부를 계속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광경은 미40사단 장병들이 볼 때 치열했던 서부전선에 싹튼 감동이었고 한국인에게 분명 희망이 있다고 확신했다.
가이사 소년병의 죽음을 기리는 보납제 축제 중 가이사의 밤. 사진/가이사고등학교 1983년 제작 앨범

가이사 소년병의 죽음을 기리는 보납제 축제 중 가이사의 밤. 사진/가이사고등학교 1983년 제작 앨범


사단장 조셉 클리랜드(Joseph Cleland) 장군을 비롯한 1만 5000명의 미 장병들이 학교건립을 위해 2달러씩 지원하면서 학교를 건립할 수 있었다. 설계는 40사단 160연대 공병장교 에이스 대위가 담당했다. 그는 하버드대 건축공학과 출신이다. 건설에 매진한 결과 40일 만에 학교를 완성했다.

여기에는 한국전쟁에서 처음 전사한 19세인 가이사 하사의 고귀한 죽음이 동기가 되기도 했다. 전쟁 중이지만 배움은 중단할 수 없기에 천막교실이 있었던 곳에 벽돌로 지어진 학교가 들어섰다. 이름하여 '2달러의 우정'이라고도 한다. 이 학교가 3만 달러기금으로 조성된 '가평 가이사 중학교'이다. 학교 이름을 미40사단 사단장의 이름을 붙여 '클리랜드 가평중학원'이라 했다가 '가이사'의 이름을 붙였다. 사단장은 죽기 전에 "내 연금의 일부를 가평의 아이들을 도와주는데 사용하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가이사 하사는 한국전쟁 중  가평에 주둔한 미40사단 최초의 전사자이다. 사단장은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학교이름을 사단장의 이름 대신 가이사 소년병의 이름을 붙일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1953년 1월13일 6학급으로 인가가 났다. 첫 졸업식인 1954년부터 약 500불의 장학금을 들고 미국 40사단 본부에서 대표단이 한국을 찾아왔다. 1954년 4월1일에는 가평가이사고등학교가 1, 2학년 각 한 학급으로 개교했다. 학교건축 표지석에는 '이 학교는 미 보병 40사단 장병들이 한국의 미래지도자를 키우기 위해 세웠다'는 설립취지를 남겼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부를 둔 미 보병 40사단은 원래 전투후방을 지원하는 지원부대였지만 한국전쟁의 양상이 심각해지자 전투에 직접 투입됐다. 그렇게 가평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산 역사의 상징인 가이사고등학교 전경. 사진/가이사고등학교 1983년 제작 앨범

한국전쟁 산 역사의 상징인 가이사고등학교 전경. 사진/가이사고등학교 1983년 제작 앨범


이제 노병들은 80대가 되었다. 상당수는 세상을 떠났다. 매년 장학금 100만원을 들고 60년 동안 학교를 찾고 있다. 이런 계기로 학교는 명문이 되었다. 13m의 영연방참전기념비는 그 날의 전투가 벌어진 가평군 읍내리 365-1번지에 세워졌다. 1967년 유엔한국참전국협회와 가평군이 세웠다.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과 한참 배우려는 젊은이들의 열기가 한 곳에 묘하게 겹쳐져 있다. 바로 참전비 옆에는 가평군립도서관이 있다.

2008년 2월14일에는 가이사 기념관인 역사관을 개관했다. 미국 L.A 40사단 부사령관 등 5명이 참석했다. 가이사고등학교는 1972년 가평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2019년 1월31일 제64회 졸업생 연인원 1만5127명을 배출하는 명문학교가 됐다. 2004년 11월에 사단장은 세상을 떠났지만 전쟁터에서 싹튼 감동의 휴머니즘과 아름다운 우정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남이섬 입구 달전리에 세워진 충혼탑을 찾아 고귀한희생을 기억한다.

남이섬 입구 달전리에 세워진 충혼탑을 찾아 고귀한 희생을 기억한다.


이제 6월이 다 가기 전에 한번 쯤 지역의 충혼탑을 찾아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린 희생자와 특히 16개국 외국연합군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점점 형식적으로만 여겨지는 현충일과 한국전쟁이 아니라 깊은 뜻을 기리는 실제적인 행사로 과감하게 탈바꿈해야 한다. 전쟁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당사자나 유가족을 예우하는 제도적인 보완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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