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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UDT 대원, 어린 소년의 슬픈 체험기
6.25한국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임창식 씨의 증언
2020-06-17 15:12:08최종 업데이트 : 2020-08-06 13:21:36 작성자 : 시민기자   김청극
지난 63주년 6.25전쟁 기념식(포토뱅크 제공)

지난 63주년 6.25전쟁 기념식(포토뱅크 제공)

금년은 6.25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자라나는 세대는 물론 6.25전쟁의 참상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 직접 경험했던 70대 이상들도 차차 그 날의 참상이 잊혀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전쟁의 후유증으로 부상과 정신적인 트라우마 속에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임창식(남, 용인 서천 거주, 86세)씨는 황해도 연백 일신면 무정리가 고향이다. 북한에서 부모님과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나 형과 누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귀엽게 자랐다. 특별한 기술없이 학교 공부는 구경도 못한 가운데 간단한 농사를 짓는 정도가 생활의 전부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북한 경찰이던 셋째 형이 하루는 공산당에게 이유없이 잡혀갔다. 어린나이였지만 그 모습 속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이 점점 커졌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그때 임창식씨는 불과 16세 까무잡잡한 소년에 불과했다. 어린나이에 공산군의 만행을 보고 자랐기에 어쩌면 북한을 탈출할 수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여기에 출신 성분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어서 탈출의 동기이기도 했다.

6월 25일 새벽 갑자기 들려 오는 총소리와 포성 속에서 천지가 진동했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북에서 남으로 여동생과 함께 황해도 연백으로부터 지리적으로 가까운 연평도로 넘어 왔다.
휠체어에 의지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임창식씨

휠체어에 의지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임창식씨

연평도는 처음에는 비교적 안전한 지대였다. 하지만 어린 여동생은 고향인 연백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했다. 위험을 무릎쓰고 고향에 주곤 연평도로 되돌아 왔다. 물론 가족 몰래 이루어진 것이다. 가족이 알았다면 불가능했을 거란다. "이게 최종적인 가족과의 생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임창식씨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때부터는 임창식씨는 완전한 고아가 됐다. 정확하게 발 닿은 곳은  황해도에서 가까운 연평도의 아주 작은 섬, 소접도와 대접도였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무인도에 가까운 아주 외딴 곳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생명을 지키는것이 우선이었다. 매일 매일의 전황은 급변했다. 갑자기 북한으로부터 당한 일이라 손쓸 틈이 없이 남한 전체가 함락됐다. 그러나 불리한 전황 속에서 마냥 숨어 살 수만은 없었다.

마침 UDT(Underwater Demolition Team, 특수작전부대)모집이 있었다. 자진하여 지원하여 북한군과 싸우고 싶었지만 키가 작아 뽑히기가 어려웠다. 딱지를 주머니에 넣고 마냥 좋아할 정도의 나이의 소년이 지원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키가 작아 대원으로 뽑히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돌멩이를 신발에 넣어 일부러 키를 커 보이게 하는 꾀를 발휘했다. 그래서 결국 UTD 8250에 합격했다.

대원은 모두 16명이었다. 작은 마을에 16명은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우리 마을을 지킨다는 순수한 소년들의 애국심이었다. 북한군은 서울이 목표이고 그곳을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작은 고을 정도는 관심 밖이었다.

탱크 등 중장비를 무장한 북한군, 대포와 총소리에 순수한 사람들은 놀라고 또 놀랐다. "날이 갈수록 전쟁의 와중에서 임창식 씨는 어린 나이로 북녘의 고향의 그리움으로 맘 편할 날이 없었다"고 말했다.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시기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신세였다. 지역을 사수한다는 측면에서도 동네의 어린아이 까지도 총을 들고 싸워야할 정도의 긴박함이었다.

칼빈과 M16이 손에 줘졌다. 그러나 소속에 대한 일체감도 희미했다. 전쟁 중에 제대로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을 겨를 없이 그저 방아쇠를 당길 줄 아는 정도였다. 임창식씨는 "전쟁 당시 훈련 받지 않은 아군의 무모함으로 곳곳에서 우리 국군도 많이 죽었다"고 술회했다.

차차 전세가 아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쫒겨가는 적군들은 작은 마을에서 약탈과 노략, 살상을 일삼았다. 후퇴하는 적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유디티 대원의 생사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미의 연속이었다. 자고 나면 또 다른 세상이 온 것 같은 착각이었다.
5년간 함께 한 요양보호사가 만남을 도왔다.

5년간 함께 한 요양보호사가 만남을 도왔다.

 얼떨결에 전쟁으로 떠밀려 중부지방인 천안까지 내려갔다. 수많은 시체와 매캐한 포탄 냄새속에서 잃어버린 서울탈환이 이루어졌다. 그 후로는 전면전에서 이제는 국지전으로 3.8선을 중심으로 전쟁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전쟁이 소강상태일때 친척 하나 없는 상태에서 유디티 대원과 함께 여주로 올라왔다. 유일한 생존자인 유디티 전우와 그곳에서 정착하며 작은 농사를 짓고 그 곳의 작은 교회의 교인의 소개로 결혼을 했다. 

슬하에 3남1여를 두었다. 그후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하여 여주에서 전우의 곁을 떠난 후 수원에서만 40년 이상을 살고 있다.  4살 아래인 아내는 4년 전 건강이 안 좋아 요양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수원시 조원동에서부터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5년간 받으며 혼자가 다소 외롭지만 살아 가고 있다. "가까운 곳에 큰 아들 내외가 효도하여 큰 불편은 없다"고 한다. "정신은 있는 것 같지만 약간의 초기 치매로 기억을 잘못한다"고 함께하는 구자희(여,고등동, 70세)요양보호사가 대신 설명했다.
전쟁의 상처 속에서도 아픔을 이겨내는 참전용사의 가족들

전쟁의 상처속에서도 아픔을 이겨내는 참전용사의 가족들

낙동강 전투, 최후의 진지를 사수하고 우리 국토를 방어해야 하는 처절한 운명 속에서 그래도 큰 부상없이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겠는가? "70년이 지난 지금도 비행기소리만 들어도 그때의 광경이 생각 나 섬칫해진다"고 몸서리쳤다. "거의 모두가 전사한 모습을 생각하며 6월에는 눈물이 더 생겨난다"고 말했다. 

더 나가 고향의 가족들 생각으로 늘 통일을 남달리 더 염원하고 있다. 연금과 참전용사로서 국가에서 일부의 생활비 지원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함께 대화를 나누며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 모두의 바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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