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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술관 신축.개관 기념전
박생광, 전혁림, 이경성, 정상화 등 국내 최정상급의 작가 작품 전시
2008-05-29 16:27:57최종 업데이트 : 2008-05-29 16:27:57 작성자 : 편집주간   김우영

아파트 단지 공사와 도로개설 등 개발사업으로 인해 아쉬움 속에 이전해야 했던 이영미술관(관장 김이환)이 2년여의 준비기간을 마치고 새로운 터전에서 신축‧개관 기념전을 갖는다.
오는 6월2일부터 8월31일까지 이영미술관 1, 2, 3층 전관 및 야외 전시장에서 열리는 신축.개관전은 'ICAM 이영미술관'으로 새롭게 선보이며 한국 현대 미술의 가능성과 생명력을 모색하는 새로운 미술관으로서의 출발을 알리는 자리다. (개관 기념식 초대 일시-6월2일 오후5시부터 7시까지) 

이영미술관 신축.개관 기념전_1
박생광 <토함산의 해돋이> 140×135cm Colors on Paper 1981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이영미술관의 새로운 출발을 찾아서'(부제: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비전)인데 신축 개관을 기념하는 기획전시회답게 박생광, 전혁림, 이경성, 정상화, 홍재연, 이재삼 등 국내 최정상급의 작가들의 작품 2000여점을 선보인다.
이들 작품 가운데는 1000호 이상 대형 작품이 다수 포함돼 있으며 한용진 등의 조각 작품 20여점, 뉴미디어 설치 미술 108여점도 전시된다.

이번 신축.개관전은 크게 ‣한국 현대 미술의 새로운 발견 ‣조형과 환경의 조화 ‣이영미술관의 미래비전: 108번의 삶과 죽음 뉴미디어전시 등 3개 파트로 구분돼 있어 눈길을 끈다.

먼저 '한국 현대 미술의 새로운 발견'에서는 박생광, 전혁림, 이경성, 정상화, 홍재연, 이재삼 등의 대표작을 소개, 한국적인 전통과 미세계가 현대 미술에서 재창조된 한국 미술의 진수를 감상할 기회를 마련한다.
'조형과 환경의 조화'에서는 한용진 등 지역 미술인들의 조형물 설치를 통해 자연환경 친화적인 예술상을 소개한다.
또 '이영미술관의 미래비전: 108번의 삶과 죽음, 뉴미디어 전시'에는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며 이영미술관의 비전을 보여주는 미디어 작품을 설치했다.  이 작품은 이영미술관의 역사와 발전, 그리고 앞으로의 비전을 소개하는 108개의 뉴미디어 작품이 108개의 모티터 영상으로 발현되는데 이 설치 미술을 통해 현대 미술관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보여준다.

이영미술관은 지난 2001년 11월 7일 개관했고 영통신시가지 옆에 자리 잡고 있다.
1977년 박생광을 만나 친목을 키우면서 미술품 수집을 시작한 이후 개인소장품 200여 점을 바탕으로 설립했다. 박생광의 작품 외에 서양화가 전혁림(全爀林)·정상화(鄭相和), 조각가 한용진 등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박생광의 '명성황후', '가야금 치는 여인', '신기루 두 번', '경주 토함산 해돋이', '성산일출봉', 전혁림의 '코리아판타지', 한용진의 '막돌 다섯', '청색과 검은색' 등이 있다.

부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이름을 지은 이영미술관은 그동안 비중 있는 기획 전시회를 잇따라 개최함으로써 한국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2002년 7월 전혁림 화백 특별전, 2003년 6월 박생광 특별전(스페인 바르셀로나), 2003년 11월 전혁림의 '여든 여덟 목기와 그림의 만남', 2003년 12월 홍재연 기획초대전, 2004년 9월 박생광 탄생 10주년 기념 특별전 및 기념 학술 세미나 개최, 2005년 6월 108번의 삶과 죽음 - Post Park Saeng Kwang Media Art Exhibition, 2005년 11월 전혁림 신작전 - '구십 아직은 젊다'및 기념 학술 세미나 등 수많은 기획전과 행사를 개최했다.

또 지역미술관으로서 지역 미술에 기여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현대 미술의 수준 높은 전시를 소개함과 동시에 지역민과 지역의 미술인이 참여하는 "경기 상상전"을 매년 기획하여 지역 미술의 활성화에 앞장서 왔다. 앞으로도 경기도가 한국 현대 미술계의 메카로 자리매김하는데 있어 소중한 역할을 할 계획이다.

이제 이 모든 노력을 기반으로 하여 이영미술관은 새로운 역사를 쓴다. 2008년 6월 2일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건물을 둥지로 삼아 한국 현대 미술계에 새로운 장을 여는 것으로 많은 미술 애호인은 물론 문화계 인사, 시민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전시 문의 Tel. 031-213-8223    Fax. 031-282-8846
    www.icamkorea.org

이영미술관 신축.개관 기념전_4
이영미술관 신축.개관 기념전_4

□ 작가 및 작품 소개□

박  생  광

박생광은 지난 2004년 8월4일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그는 이국(異國)의 정신·물질문화가 정통인양 판을 치던 때, 내 나라의 전통 문화와 역사를 화두로 잡고 화업에 정진했던 '민족혼의 화가'다. 
말년 10년간 화업이 만개한 그는 수묵화가 주류였던 시기 '무녀', '토함산 일출', '시왕도' 등을 통해 고구려벽화와 고려불화, 단청, 민화, 무속화로 이어지던 우리 민족의 화려한 색감인 오방색을 작품 속에 재현하고, 토속적이고 역사적인 소재로 민족혼을 담았다. 
그의 만년 걸작인 '명성황후'나 '전봉준'은 이 같은 그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경남 진주태생인 박생광은 1920년(17세)에 일본유학을 떠나 그림을 시작하게 된다. 그때부터 해방될 때까지 그는 일본에서 거주하면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당시의 한국화단은 너무나 혼란한 시대적 상황의 연속이었고 특히 대일본 회화(對日本繪畵)배척운동의 일환으로 척색사조(斥色思潮)가 화단전체에 일고 있어 순수한 작업생활에 정진하지 못하게 된다. 귀국 후 그는 생활을 부인에게만 의존하였고 이에 따라 가세가 점점 어려워져 집 앞부분을 수리하여 다방을 경영하였는데 그 다방은 진주 문예인들의 중심적인 모임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되고. 결국 그는 1967년에 상경하여 화가 천경자의 권유로 1968년부터는 홍익대학교에 강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 후 1974년에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 '원전(院展)'에 참가하였고 그것을 계기로 원우(院友, 원전회원)에 초대되어 그의 딸과 두 번째 일본 체제기간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서의 그는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가지면서 나름의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1977년에 다시 귀국한 그는 서울 진화랑의 초대로 최초의 서울개인전을 가졌다. 이즈음부터 그는 70대 중반을 넘는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작업량을 보이게 되는데 경주를 여행한 이후 1981년(78세)에 백상기념관에서 다시 개인전을 개최하여 서서히 국내화단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1982년에는 수개월에 걸쳐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기도 하는데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강행했던 그 여행은 그의 불교와 관련한 절대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인도 현지에서 만났던 서경보 스님과의 여행을 마친 후 다시 일주일 정도의 불란서 여행을 다녀오게 되는데, 귀국하여 술회하기를 "남은 생명의 등불을 초연한 자연으로서 전신(傅神)의 경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되뇌었다 한다.
박생광은 그 후 줄곧 도봉의 기슭에서 온종일 작업에 몰두하였고 1984년 4월에 도자기를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약 두 달간에 걸쳐 세 번째로 일본에 체류한 후 귀국하였다. 
이어 한국화단에 열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던 미술회관에서의 개인전을 개최하고, 그 해 여름에는 또 다시 보름여에 걸쳐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을 인상적으로 관람하고 돌아왔다. 
그러던 그는 1984년 7월. 81세에 이르러서 후두암이라는 한정성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병에 굴하지 않고 더욱더 청아한 정신자세로 삶의 세계를 초월하는 입신의 경지에서 의욕적이고도 초인적으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84년 10월에 파리에서의 한국미술특별전 준비차 내한 했던 욜란서의 토트리브 미협회장 을 만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85 르 살롱전'의 특별초대작가로 초대되었다.
당시 박생광에게 감명한 토트리브는 그에게 샤갈과의 상봉을 주선해 주기로 약속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85년 3월에 샤갈의 부고(訃告)에 매우 낙담하기도 하였는데, 그해 7월에 박생광도 82세의 긴 생을 마치고 영면(永眠) 하였다.

전  혁  림

이영미술관 신축.개관 기념전_2
전혁림 <새 만다라(曼茶邏)> 320개 각 20×20cm Oil on Wood 2005

전혁림은 '색채의 마술사' 또는 '바다의 화가'로 불리며 한국적 색면 추상의 선구자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조형의식을 토대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왔다.
연륜(1915년생)이 말해주듯이 현대사의 격동기와 다양한 문화 변동을 살아낸 몇 안 남은 이 시대의 위대한 원로 대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부산미술전(1938년)에 '신화적 해변', '월광(月光)' 등의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가기 시작하였다. 지방작가들의 흔한 보수적 성향에 비하여 거의 유일하게 그는 현대미술의 전위적(前衛的) 조형 방법으로서 전통을 표현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로 인해 실험의욕이 자기 영역의 확대를 시도하여 발랄한 생명감의 발산에 빠져든다. 
그는 광복의 감격과 곧이어 닥친 여러 시련 속에서도 유치환, 윤이상, 김춘수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창립(1945)했다. 
6.25 이후 부산에서의 유랑 생활을 거쳐 국전에 특선했다. 

피난지 부산의 화단은 전혁림을 화가로서의 토대를 굳혀주었다. 
1950년대 앵포르멜이 주류를 이루는 비정형 회화를 부산에 최초로 선보이기도 한 부산 근·현대 미술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며 영남지역 비구상회화의 근원도 바로 전혁림 화백이다.
"중앙"화단과의 거리를 두고 미술계의 폐단인 학연 등에 연연하지도 일시적인 유행에 타협하지도 않으며 고향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와 풍경을 이룩한 이 노대가의 작품은 현재 망백(望百)을 지난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비롭게도 나날이 성숙해지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로 많은 예술인들을 인도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에도 그의 탐구 혼은 쉴 줄 모르고 또 다른 차원의 조형 세계를 모색하고 있으며 지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과 미의 탐구, 예술에 대한 열정이 오늘도 그를 젊게 불태우고 있다.

전혁림은 1915년 경남 충무 출생으로 통영 수산전문학교 졸업하였고 1938년 부산 미술전에서 <신화적 해변> <누드> <월광> 출품하며 화단에 데뷔 하였다. 1949년 제1회 국전입선,  1953년 제2회 국전에 <늪>을 출품하여 문교부장관상, 1962년 부산시 문화상, 1984년 충무시 문화상, 1996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상하였으며, 2002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 되었다.  2005년 이영미술관에서의 전혁림 신작전 "90, 아직은 젊다" 2007년 통영에서의 현대미술의 거장-전혁림 특별초대전 등 현재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이  경  성

석남 이경성은 1919년 인천에서 출생했다. 동경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3년 동대학 문학부 미술사 연구과정에서 수학한다.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홍익대박물관, 워커힐 미술관, 서울올림픽 미술관 등의 관장을 지냈다.
이화여대와 홍익대 교수, 제1회 광주비엔날레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72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 1984년 보관문화훈장 수장, 1992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1994년 세종문화상, 2000 예술문화상 대상, 2003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하였으며, 저서로는 1961년 〈미술입문〉, 1962년 〈한국미술사〉, 1975년 <한국현대미술사>, 1976년 〈미술이란 무엇인가〉, 1978 〈교양을 위한 미술〉, 1975년 〈현대미술의 이해를 위하여〉, 2002년 <김환기의 삶과 예술, 내가 그린 점 하늘 끝에 갔을까>, 2002 <아름다움을 찾아서>, 2004 <망각의 화원> 등이 있다. 
1981년부터 석남미술상을 제정하여 시상해오고 있으며, 현재는 가회동 한국병원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틈틈이 붓을 잡고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주요 전시로는 1988년 〈석남 이경성 선생 고회기념 미술전〉 호암갤러리, 1988년 김수근문화재단 기금모금을 위한 〈석남 이경성 회화전〉 공간미술관, 1988년 〈바람·사람전〉 L.A. 한국문화원, 1991년 〈석남미술문화재단 기금모금을 위한 이경성전〉, 1996년 〈석남 사람이야기전〉 샘터화랑, 1998년 〈석남 이경성전〉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00년 〈석남 이경성전〉 파리 한국문화원, 2002년 〈석남이 그린 사람들전〉 인사아트센터 등이 있다.

정  상  화

정상화는 우리 미술의 흐름을 알아보는데 반드시 언급해야 할 주요 작가 중 한 명이다. 다시 말해 그는 50년대 후반 이후 전개되어온 현대미술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60년대, 70년대를 건너 최근까지 큰 영향을 미쳐왔다. 

정상화의 초기 작품 경향을 한마디로 말하면, 앙포르멜로 요약된다. 
58년의 한국현대작가 초대전(조선일보사 주최), 62년의 악뛰엘전, 63년의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 등의 전시들을 거치면서 그가 가장 주목했고 심혈을 쏟은 문제는 전후의 어두운 사회적, 정신적 분위기를 심층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정상화의 화면엔 일정하게 덮여진 색층만 있을 뿐 아무 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그림에 따라 다니는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제스쳐에 의한 일정한 표현의 설정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있으면서도 그림이 없는 그림, 다소 역설적인 상황 속에 서야만 그의 화면은 이해된다. 화면이 비어있다는 것은 보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단지 거기엔 침묵이 강요될 뿐이다. 미니멀리즘의 화면이 그렇다. 미니멀리즘의 화면 앞에선 누구나 명상의 세계로 갈 것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정상화의 화면은 일반적인 미니멀리즘에서와 같이 침묵만이 강요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화면 앞에 서면 이제 막 말을 시작해야 한다는 은밀한 지시가 있다. 
물론 이 경우에 있어 말은 소리 내어 하는 말이 아니다. 숨소리를 죽인 조용조용한 말, 소근거리는 말이다. 그것은 그의 화면이 무기적인 평면이 아니라 숨쉬는 지표, 유기적인 표면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정상화는 1932년 경상북도 영덕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67년부터 1968년까지 재불(파리),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재일(고베) 다시 1977년부터 1992년까지 재불(파리)하며 작품활동을 하였다. 
한국, 일본, 프랑스, 독일 등에서 29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국제전, 단체전을 가진바 있으며 현재는 국내에 머물며 작품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한  용  진

이영미술관 신축.개관 기념전_3
한용진 <막돌다섯 Five Cobbles> 6300×1600cm 2000

한용진의 돌은 옛 산성의 모퉁이 돌과 같은 푸근함과 자연스러움이 있다. 
그는 자연 그대로의 돌에 최소한의 손질을 하여 작품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인위적이지 않은 투박한 맛이 느껴진다. 
그의 〈막돌다섯〉연작은 세월의 흔적을 담은 옛 사찰의 탑과 같은 태고의 미를 지녔다. 
그가 조각을 처음 배운 것은 경기 중학 시절 은사였던 박승구로 부터다. 
동경미술학교 졸업하고 목조로 관음보살상을 만들었던 박승구로 시작해 서울대에 와서는 김종영에게서 추상조각을 배웠다. 
서울대 재학시절에는 당시 서양화과 교수였던 장욱진의 덕소 화실에 윤명로, 김종학 등과 함께 화실 벽면의 벽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미국에 건너가 뉴욕 근교에 머물면서 김환기와 때때로 잔디밭에서 이야기를 하며 그의 예술혼을 배웠다. 그는 거친 돌을 다루면서도 꼭 자신의 손으로 모든 과정을 작업한다. 그래야 작품에 작가 자신의 혼을 실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용진은 193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서울대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뉴욕에서 작업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및 서울을 오가며 활동을 하고 있으며,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대형 공공 조형물을 남겼다. 
국립 현대미술관 야외 조각장에 석조작업이 전시되어 있고,  2006년 5월 캘리포니아 북부 소재 레딩시 시청의 조각공원에 그의 한국 화강석 조각품이 영구 설치 되었다. 
한국 조각 분야의 최고 권위상인 김세중 조각상을 수상한 그는 한국 근대 조각의 형성기 이후 추상적인 석조로 작업하는 현대 조각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주요전시로는 1979년 Art Expo 79 (콜리세움, 뉴욕), 1983년 FIAC 83 (Poindexter, 파리), 1988년 한국현대미술전 (국립현대미술관), 1989년 백남준,한용진 : 시계와 바위 (La Galerie De Paris, 파리) 1994년 현대갤러리 초대전, 2000년 한국현대미술의 시원(국립현대마술관) 등이 있다.

홍  재  연

홍재연은 1947년 경북출생으로 1971년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및 1981년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78년 한국미술청년작가회관에서의 제 1회 개인전 부터 2003년 이영미술관에서의 개인전 등 한국, 일본, 프랑스, 덴마크 등에서 22회의 개인전과 샤말리아 트리엔날레, 국제임펙트전, 서울국제판화 비엔날레 1986년 서울 현대미술제, 1988년 88올림픽 기념전, 1993년 예술의 전당 전관 개관기념 현대미술전, 1994년 서울국제현대미술제, 2002년 부산국제판화제 등 다수의 국제전, 단체전에 초대되었다. 
서울시립미술관, 한가람미술관, 토탈미술관, 신천지미술관, 심온미술관, 흑룔강성 판화가협회, 안산지방검찰청, 스위스 한국대사관, AMAC Museum (프랑스), 영국대영박물관 한국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신라미술대전, 단원미술대전의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등 다수의 미술대전의 운영위원, 심사위원 및 심사위원장과 ,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한국현대판화가협회 회장, 이후전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88년 체육부장관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현재는 경기대학교 미술학부 서양화과 교수로 있다.

이  재  삼

이재삼은 1960년 강원도 영월출생으로 강릉대학교 미술학과와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2007년 갤러리 아트사이드, 2005년 이영미술관 등에서 16회의 개인전과 2005년 신소장품 2004 (국립현대미술관), 2004년 실존과 허상 (광주시립미술관), 중국 국제 화랑 박람회 (중국 국제 과기회 센터, 북경), 2003년 얼굴, 표정 (대전시립미술관), 화랑미술제 (선화랑, 예술의전당), 2002년 한·중 새로운 표정전 (예술의전당), 개 "The dog"전 (갤러리 사비나), 1999년 뒤셀도르프 한국작가 특별전 (독일, 뒤셀도르프), 1996년 한국현대미술작가전 (스페인, 바르셀로나), 1995년 한국의 이미지전 (우즈벡 타시켄트), 한국현대미술의 표현매체전 (서울시립미술관) 등 다수의 기획·단체전에 초대되었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이영미술관 입주작가로 작품활동을 했으며, 2003년 KBS 디지털미술관 방영, 2000년 올해의 한국미술선 선정 및 1998년 중앙미술대전 장려상, 1983년 청년미술대상전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김  현  철

김현철은 1973년 생으로 2003년 프랑스 오르레앙보자르에서 사진비디오, 2005년 파리8대학에서 포토 멀티미디어 석사, 파리 아르데코 이미지 샹테르에서 컴퓨터그래픽과 뉴미디어아트를 공부했다. 
2003년 프랄스 아를르 사진페스티발 그라사보에 대상, 2004년 이마쥬 오 썽트르 페스티발 대상을 수상 한바 있으며, 2005년 쌈지스페이스 제7기 레지던시 프로그렘과 2006년 보다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 했다. 
2005년 이영미술관에서의 Picturing Korean Vision and Visual에 참여하는등 뉴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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