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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전통과 고샅길이 어우러진 낙안읍성
2016-01-15 07:30:00최종 업데이트 : 2016-01-15 07:30:00 작성자 :   연합뉴스

(순천=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정겨운 고샅길을 걷다 보면 담 너머로 '고향 집의 정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낮은 담장과 사립문 사이로 보이는 마당가에는 조그만 장독대가 있고 마당 한쪽엔 채소밭이 있다. 양지바른 처마 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시래기와 메줏덩어리, 곶감 꾸러미 등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그 정경에 쏠려 자신도 모르게 사립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하지만 가옥 대부분이 개인 소유이다 보니 반드시 주인의 허락을 받고 집안 구경을 해야 한다. 채소밭에서 일하던 한 주민은 "살고 있는 집에 불쑥불쑥 들어오는 탐방객 때문에 불편할 때도 있다"면서 "마을 사람 대부분이 전통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산다"고 말한다.

<문화유산> 전통과 고샅길이 어우러진 낙안읍성_1
사진/이진욱 기자

한 해 90여만 명이 찾는 낙안읍성(樂安邑城)은 순천 시내에서 18㎞가량 떨어져 있는 옛 읍성으로 성벽이라는 방어시설을 갖춘 성곽도시이자 주변 지역을 관할하는 지방행정도시였다. 일반적으로 읍성은 외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산등성이에 축성하는 것이 보통인데 낙안읍성은 평지에 축성된 야성이다. 낙안은 평야가 많아 고려 시대 말엽 이후 왜구들의 침략이 매우 극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화유산> 전통과 고샅길이 어우러진 낙안읍성_1
사진/이진욱 기자

국내에서 유일하게 성내에 98세대 23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낙안읍성은 국내 읍성 가운데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낙안읍성은 진산인 금전산(667.9m)을 북에 두고, 동쪽 오봉산(591.5m)을 우 청룡으로, 서쪽 백이산(584.3m)을 좌 백호로 삼았으며 남쪽엔 제석산(563.3m)과 안산인 옥산(97m)이 있다. 성벽은 사다리꼴에 가깝다. 길이가 남쪽 약 460m, 북쪽 340m, 동쪽과 서쪽이 모두 약 310m이며 성벽의 둘레는 약 1천410m이다. 성곽 서북쪽에 조그만 구릉과 대숲이 있어 서북풍을 막아준다.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4∼5m이다.

<문화유산> 전통과 고샅길이 어우러진 낙안읍성_1
사진/이진욱 기자

동문으로 들어가 객사와 동헌을 둘러보고 낙민관자료전시관을 거쳐 읍성의 일반 주민이 이용하는 서문 쪽에서 석성에 올라 성벽 위의 좁은 길을 따라 남문까지 걸어본 뒤 마을로 내려와 고샅길을 걸으며 중요민속자료 가옥을 둘러보고 짚 꼬기와 길쌈 등을 체험하면 제대로 읍성을 돌아보는 것이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조선시대 일반 읍성이 남문을 이용한 데 반해 낙안읍성은 지리적 여건상 낙풍루(樂豊樓)라고 부르는 동문이 정문 격이다. 문루는 2층 다락으로 되어 있고 드나드는 문은 삼문으로 되어 있다. 동문 앞에는 조그마한 석구(石狗·삽살개) 3기가 세워져 있고 일종의 방어시설인 해자와 평석교가 놓여 있다. 여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평석교 위에 걸터앉아 놀기도 하고 음력 정월 대보름날이면 나이 숫자대로 다리 건너기를 하였는데 이를 다리 밟기(탑교놀이)라고 한다.

동문을 들어서면 읍성 안길이 서문 쪽으로 널찍하게 일직선으로 나 있고 길 오른편으로 관아, 왼편으로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낙안읍성은 산을 배경으로 그 앞에 관아가 형성되고, 관아 앞으로 백성들의 살림집이 들어서는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고을 경관이다.

<문화유산> 전통과 고샅길이 어우러진 낙안읍성_1
사진/이진욱 기자

낙풍루에서 조금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임경업 군수 선정비가 있다. 비각은 팔작지붕의 대문을 갖춘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귀신, 비신, 이수의 격식을 갖춘 비석에서 임경업 장군에 대한 백성의 흠모를 느낄 수 있다.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임경업 장군이 하룻밤 사이에 쌓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1397년 낙안 출신의 수군절제사 김빈길이 주민을 동원해 토성을 축조했다. 그 뒤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1626∼1628)로 봉직하면서 토성을 석성으로 중수하고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선정비 바로 앞에는 객사로 들어가는 홍살문이 설치돼 있다. 객사 입구에 홍살문을 세워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도록 하고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의미도 있으며 하마비가 있어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도록 했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 자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闕) 자가 새겨진 두 개의 나무패를 모셔 두고, 군수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여기에 대고 배례를 올렸다. 또한 중앙에서 관리가 출장을 오면 이곳에서 거처했다. 요즘의 영빈관과 같은 곳이다,

객사를 나와 광장을 거쳐 동헌까지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조형물 포졸들이 지키고 있는 동헌에 들어가면 앞마당 양쪽에는 형틀과 곤장을 때리는 장면의 모형이 설치돼 있다. 용인 민속촌도 아니고, 고즈넉한 읍성 분위기와는 다소 어긋나는 느낌이다.

동헌 사무당(使無堂)은 군수, 현령 등 지방관이 주재하며 향리를 거느리고 공무를 보던 지방관아 건물이다. 뒤로는 진산인 금전산 자락에 안긴 듯하고 남쪽으로 안산인 옥산을 바라보며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다.

<문화유산> 전통과 고샅길이 어우러진 낙안읍성_1
사진/이진욱 기자

동헌 앞에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낙민루(樂民樓)가 있다. 이 누각은 낙안의 군수였던 민중헌(1845~1847년 재임)이 지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 때 불탔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장현주 문화해설사는 "수령이 동헌으로 출근하기 전에 높은 누에 올라 간밤에 백성들이 별일 없이 잘 지냈는지 길에 오고 가는 백성들의 얼굴을 살펴보고, 집집이 굶주리는 사람 없이 밥은 지어 먹는지 밥 짓는 연기가 나는 것을 살펴본다고 하여 이 누각을 찰미루(察眉樓)라 불렀다"고 설명한다.

낙민루 인근의 낙민관자료전시관에는 조상들의 애환과 체취가 묻어 있는 생활용품과 향토 유물 약 7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특히 낙안의 역사적 배경과 낙안 관련 문헌, 선조들이 사용하였던 가재도구와 생활용품, 낙안 지방에서 전래한 민속놀이와 통과의례, 음식문화를 알아볼 수 있다.

◇ 초가와 돌담 그리고 고샅길

낙추문(樂秋門)이라고 불리는 서문은 일제강점기에 없어졌다. 아직 문루는 복원되지 않았지만 옹성은 복원됐고 성문 양편으로는 성곽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성곽으로 오르는 길은 낙풍루, 쌍청루, 낙추문 양편으로 오르는 계단 이외에도 16곳이 있다. 주민들이 임경업 장군이 쌓은 성이어서 성벽에 손을 대면 부정을 탄다고 믿고 있어 성벽의 훼손이 적었다.

<문화유산> 전통과 고샅길이 어우러진 낙안읍성_1
사진/이진욱 기자

서문 계단으로 올라 남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대나무 숲을 거쳐 곧바로 최고의 조망 지점에 닿는다. 발아래로 뭉게구름처럼 흩어져 있는 초가집과 관아, 장터 등 마을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 밖으로는 너른 들판이 아득하다.

성곽을 쉬엄쉬엄 걷다 보면 이내 남문인 쌍청루(雙淸樓)에 이른다. 동문인 낙풍루와 달리 문이 하나다. 성문 앞에는 넓은 들이 있고 성내 모든 골목길이 그물처럼 남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부터 성안에서 초상이 나면 상여가 성문 밖으로 나갈 때 남문으로 나갔다고 전한다.

성곽을 둘러본 뒤 마을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읍성의 중심 도로가 아닌 길들은 완만한 곡선형의 좁은 골목길이다. 양옆으로 눈높이 정도의 돌담이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형의 길이다. 돌담길의 폭은 1∼2m가 대부분이었지만, 3∼4m쯤 돼 보이는 제법 넓은 길도 있었다. 낮은 담 너머로 성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기웃거리다 보면 어디선가 개구쟁이 꼬마들이 누렁이와 함께 뛰어 나올 것 같다. 잊고 지낸 어린 날의 동경이 되살아나지만 이곳도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친 지 오래다. 젊은 사람들은 순천 시내에서 거주하며 아이를 키우기 때문이다.

초가집은 천천히 살펴보면 같은 듯 각각 다른 구조와 형태를 지녔다.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일자형 가옥으로 초가삼간이 많다. 간이란 기둥 사이를 말하며, 초가삼간은 네 개의 기둥이 세워진 3개의 공간으로 부엌 1칸, 안방 1칸, 윗방 1칸이 된다. 초가삼간 다음으로 많은 주택 형식은 네 칸 집이다. 그것은 세 칸에 대청을 하나 추가한 꼴인데 대청은 큰방과 작은방 사이에 들어간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은 동내리의 박의준 가옥(92호), 최창우 가옥(97호), 최선준 가옥(98호), 서내리의 김대자 가옥(95호), 주두열 가옥(96호), 김소아 가옥(99호), 남내리의 양규철 가옥(93호), 이한호 가옥(94호), 곽형두 가옥(100호) 등이다.

<문화유산> 전통과 고샅길이 어우러진 낙안읍성_1
사진/이진욱 기자

남문을 내려오면 바로 문 앞에 초가삼간 최선준 가옥이 있다. 길가 쪽으로 가게를 두고 그 뒤에 살림방과 부엌을 붙여 놓아서 평면이 밭전(田) 자 형이다. 네 칸 집인 박의준 가옥은 19세기 중엽에 지어진 이방의 집이다. 1천300㎡(400여 평)에 달하는 너른 대지에 부속 채를 하나 거느리고 있다. 남내리의 길가에 위치한 이한호 가옥은 토담집 특유의 수수함과 소박함을 보여주는 집으로 부엌에는 부엌신인 조왕신이 모셔져 있다.

대지와 사람이 두루 평안하다는 '낙토민안'(樂土民安)에서 유래된 마을 이름 '낙안'(樂安)처럼 이곳에서는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 듯 참 평온하다.

관람 시간은 동절기(12∼1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2월부터 4월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요금은 일반 4천원, 청소년과 군인 2천500원, 어린이 1천500원. 문의 061-749-8831

changho@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1/15 07:3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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