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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어때] 기찻길 옆 미술관, 미술관 옆 수목원
2021-06-02 14:48:39최종 업데이트 : 2021-06-02 07:30:14 작성자 :   연합뉴스

25년간 방치된 폐공장이 예술공간으로…전주 팔복예술공장
(전주=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잡음이 뒤섞인 음질, 들으면 들을수록 늘어지는 기묘한 소리.
1960년대 탄생한 카세트테이프는 아날로그 시대를 대표하는 음반 매체다. LP에 비해 작고 저렴하다는 장점을 내세워 1980년대 워크맨과 함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시절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라디오에서 나오는 유행가를 테이프에 녹음해 나만의 음반을 만들었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1979년 전주 팔복동 산업단지에 들어선 '썬전자'는 이 카세트테이프를 만들어 수출했던 공장이다. 카세트테이프가 각광받던 시절, 종업원이 500명에 이를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 등장한 CD와 MP3에 밀려 테이프가 사라져가면서 위기를 맞았다. 1987년에는 임금 협상 과정에서 노사 갈등이 극한에 다다르며 사측이 공장을 폐쇄하고 쏘렉스로 사명을 바꿨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이 400일 넘게 파업했고, 결국 1992년 문을 닫았다. 폐업 이후 25년간 애물단지로 방치됐던 공장이 다시 문을 연 것은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의 폐산업시설 재생사업을 통해 '팔복예술공장'이라는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 이팝나무 철길 따라
전주 제1일반산업단지 입구에서 북전주역으로 난 철길 '북전주선'을 따라 500여m 걸어가면 팔복예술공장이 있다.
1년 중 예술공장을 찾는 방문객이 가장 붐비는 시기는 5월 초. 이즈음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데다 예술공장 옆 철길을 따라 이팝나무꽃이 만개해 하얀 터널을 이루기 때문이다.
1981년 전라선 철도가 전주의 동북부를 우회하는 경로로 이설되면서 이 철길은 화물을 실어나르는 북전주선이 됐다.
지금도 평일 오전에는 화물 열차가 하루 두세 차례 오간다. 덕분에 매년 늦은 봄이면 하얀 이팝나무 터널 아래로 열차가 지나가는 동화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
철길을 따라 1.4㎞가량 늘어선 이팝나무는 1990년대 조경수로 심어진 것이다.
하얗게 만개한 꽃송이를 멀리서 보면 마치 사발에 소복이 얹힌 흰 쌀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밥나무라고 불리다 이밥이 이팝으로 변했다고 한다.
여름에 들어서는 입하(入夏)에 꽃이 피기 때문에 입하목이라 불리다가 이팝으로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전에는 모내기가 한창일 때 개화하는 이팝나무의 꽃 상태를 보고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도 한다.
◇ 예술이 된 공장
철로 바로 옆에는 팔복예술공장이라고 쓰인 녹슨 물탱크가 우뚝 서 있다. 그 너머로 쏘렉스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는 굴뚝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겹치는 장면이다.
낡은 콘크리트 건물 두 개 동으로 이뤄진 팔복예술공장은 40여년 전 공장으로 쓰일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여기저기 금 가고 칠이 벗겨진 콘크리트 벽과 그 위에 남아있는 낙서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전시장과 작가들의 창작 스튜디오로 구성된 A동 로비는 이 건물의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1992년 공장이 문 닫을 당시 이곳에 쌓여 있었던 먼지와 낙엽들, 팔려나가지 못한 카세트테이프들, 누렇게 바랜 출근부와 생산일지, 격렬했던 파업 현장이 담긴 노동자 소식지 '햇살'…
당시 이곳에서 여공으로 일했던 이들의 인터뷰도 영상을 통해 볼 수 있다.
로비 옆 카페 '써니'에도 그 시절 흔적이 가득하다. 옥상에 버려져 있던 지붕 함석판은 25년간 비를 맞으며 녹슬어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했고, 낡은 철문은 테이블로 변신했다.
카페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인형은 이 공장에서 테이프를 조립했던 소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나팔바지를 입고 두건을 쓴 여공의 손이 커다란 체구에 비해 유난히 작다. 길고 긴 노동에 닳고 닳은 듯하다.
카페에서 일하는 바리스타들은 동네 아주머니처럼 친근하다. 모두 팔복동 주민들이다. 진지하게 작품과 공간을 설명해주는 해설사 역시 주민들이 도맡아 하고 있다.
1980∼1990년대 제조업이 성행했을 당시만 해도 팔복동에는 백양 메리야스, 코카콜라 등 굵직굵직한 회사의 공장이 즐비했다.
하지만 제조업이 사양산업이 되면서 이곳도 쇠퇴해 3만명이었던 주민이 8천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팔복동 주민자치위원장이었던 김정임 해설사는 "2016년 사업을 추진할 때부터 전문가들이 주민들과 매주 모여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 논의했고, 그 결과 주민이 함께 일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며 "무엇보다 좋은 점은 어둡고 삭막했던 이곳이 밝게 변하면서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됐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A동 1층에는 예술가들이 입주해 창작활동을 하는 '창작 스튜디오'도 있다. 팔복예술공장은 매년 작가들을 선발해 1년간 창작공간과 숙소를 제공하고 전시 기회도 주고 있다.
본격적으로 전시를 관람하려면 2층으로 올라가 보자.
다양한 주제의 기획전이 열리는 메인 전시실을 둘러본 뒤 전시실 남쪽 문으로 나가면 공장 노동자의 애환이 서린 작품이 하나 더 있다. 그 옛날 여공들이 썼던 화장실이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된 공간이다.
400∼500명에 달하는 여공들이 쓸 수 있었던 화장실은 오직 4칸뿐. 그 시절 작업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A동 2층에서 컨테이너 브리지를 따라가면 B동이 나온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놀면서 예술을 스스로 체득하는 '꿈꾸는 예술터'와 작년 10월 개관한 '이팝나무 그림책 도서관'이 있다.
이팝나무 그림책 도서관에서는 1820년대부터 팝업북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가 6월30일까지 열린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아이라면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전시다.
책 속에서 이미지가 솟아오르는 팝업 형태 외에도 작은 구멍 사이로 깊이 있는 풍경을 재현한 터널북, 360도로 펼쳐지는 캐러셀북, 제본하지 않고 주름을 접어 만든 파노라마북, 탭을 당기면 움직이는 무버블북까지 다양한 형태의 팝업북을 만날 수 있다.
◇ 도심 속 힐링 공간 '전주수목원'
전주를 나가고 들어오는 차들로 쉴 틈 없는 전주 톨게이트. 그 인근에 있는 한국도로공사 전주수목원도 요즘 찾는 이들이 많다.
팔복예술공장에서 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코로나19로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지난 3월 30일부터 운영을 재개했다.
전주수목원은 공기업에서 운영하는 전국 유일의 수목원이다.
1970년 호남고속도로 건설로 유휴지가 발생함에 따라 1974년 도로공사 논산지사 '전주묘포장'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훼손된 자연환경을 복구하기 위해 수목을 심어 공급해 온 곳이다.
1983년부터 다양한 식물종을 수집하면서 수목원을 조성, 1995년 '전주수목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약 29만여㎡의 부지에 수생식물원, 장미원, 무궁화원, 죽림원, 남부수종원, 허브원 등 20여 주제의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 둘러보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다양한 종류의 수련과 연꽃, 창포 등이 자라는 수생식물원이다.
정자가 있는 수생식물원의 풍경 쉼터는 수목원 내 최고의 포토 스폿으로 꼽힌다. 주말이면 '인생샷'을 건지려는 줄이 길게 늘어선다.
5월 초 찾은 수목원에는 초록빛 풀로 뒤덮인 연못 위에 수련 한두 송이가 일찍 꽃망울을 터뜨린 상태였다.
연못을 둘러싼 메타세쿼이아 나무의 연둣빛이 싱그러움을 더한다.
6월에는 수련, 연꽃과 함께 장미와 수국이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1년 6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hisun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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