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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어진>, 인생 전체를 저당 잡힌 그림 감옥에서 이룬 대작
수원미술관 ‘이길범: 긴 여로에서’ 전시회, 6월 9일까지
2024-03-22 13:51:28최종 업데이트 : 2024-03-22 13:51:27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전시장 내. 관람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림을 보고 있다.

전시장 내. 관람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림을 보고 있다.


 미술관에 자주 간다. 이런 취향을 두고 주변에서 "그림을 볼 줄 아나"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그림을 보는 행위를 지식의 영역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실제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법' 등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림은 호기심의 대상이다. 보고 즐기다 보면 마음이 끌린다. 그림이 좋아지고 저절로 보는 눈도 생긴다. 

 수원미술관의 '이길범: 긴 여로에서' 전시회도 보고 싶은 전시회였다. 전시장에는 수원화성 그림이 많다. 소박한 풍경으로 고향의 속살을 펼쳐놓았다. 고향의 체취 같기도 하고, 어린 날 삶 같기도 하다. 검은 먹빛으로 숭고한 자연의 색을 그렸다. 자연의 맑은 서정도 풍겨 바람 소리 새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이길범 그림에는 특별한 사조가 없다. 선사시대에도 그림이 있었던 것처럼, 원초적인 언어 느낌이다. 늘 곁에 있던 고향의 풍경은 붓을 들기 전부터 마음속에 자리한 자연이다. 어떤 대상보다 마음을 그렸다. 고향 풍경에서 받은 영감에 자연의 보편적 아름다움을 덧붙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독서>. 인물화 앞에 서면 섬세함과 따뜻함이 번져온다.

<독서>. 인물화 앞에 서면 섬세함과 따뜻함이 번져온다.


 이길범은 수원에서 <성묵회>를 결성하고 조직을 이끌었다. 창립취지문에서 세속적인 화풍에 대한 경계와 저급한 베끼기 작품이 양산되는 현실을 비판한다. 이것도 결국 한국 미술에 대한 고언일 뿐이다. 그 후로도 특별한 미술 사조를 따르거나 다른 사람들과 화풍을 교감하는 모임은 하지 않았다. 중앙 화단이 아닌 수원에서 모임을 결성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향 화단에 대한 작은 애정일 뿐 세속의 가치를 좇지 않겠다는 의지다. 
 
<수원화성>. 고향 풍경에서 받은 영감에 자연의 보편적 아름다움을 덧붙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수원화성>. 고향 풍경에서 받은 영감에 자연의 보편적 아름다움을 덧붙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영모화조는 민화의 전통을 잇는 인상이 있다. 고양이, 까치, 모란, 국화, 연꽃 등은 동양화에서 많이 등장하는 소재다. 기법도 동양화를 연상하게 한다. 먹 선에 다양한 색이 결합하면서 대상이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효과가 난다. 자신만의 고유한 조형 언어와 색채로 미의식을 표현한다. 
 
<정조 어진>. 관람객들은 숨죽인 듯이 보고 있지만, 내면에는 작은 소란스러움이 느껴진다. 화가의 상상력과 실재 인물처럼 다가오는 신비함에 아우성치는 숨소리다.

<정조 어진>. 관람객들은 숨죽인 듯이 보고 있지만, 내면에는 작은 소란스러움이 느껴진다. 화가의 상상력과 실재 인물처럼 다가오는 신비함에 아우성치는 숨소리다.


 영모화조화에서 다룬 소재는 각기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한다. 모란은 부귀와 영화를 고양이는 장수를 의미하고 참새와 까치는 길조로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이런 의미를 담기 위해서는 순서가 필요하다. 화가는 붓을 들기 전에 먼저 마음으로 깨닫고 심상을 정한다. 이 순간부터 화가의 작업은 시작된다. 이런 순서는 성실함과 노력도 필요하다. 그래서 이길범의 영모화조는 작품 하나하나가 생명력을 갖고 있다. 

고양이는 장수를 의미한다. 이길범의 영모화조는 작품 하나하나가 생명력을 갖고 있다.

고양이는 장수를 의미한다. 이길범의 영모화조는 작품 하나하나가 생명력을 갖고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인물화도 화가의 삶이 들어있다. 이길범은 근대 어진 화가 이당 김은호의 화풍을 범본으로 수련하면서 정밀한 필치와 고아한 채색기법을 익혔다. 청출어람이라고 할까. 이길범의 인물화는 인물에 대한 해석이 깊고 넓다. 인물화 앞에 서면 섬세함과 따뜻함이 번져온다. 검은 먹빛에 채색이 대조되면서 인물의 내면에 한발 다가간 느낌이다. 유화 등으로 그리는 서양화에서 느낄 수 없는 독창적인 기법이다. 

 정부 표준 영정 제작 화가로 그린 <정조 어진>도 독보적인 인상을 준다. 정조의 얼굴은 상상화다. 상상화이지만 정조는 우리에게 실재처럼 다가왔다. 백성을 사랑한 군주의 얼굴이다. 의젓한 몸가짐은 문무를 겸비한 임금의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장엄한 느낌은 실재와 상상의 경계를 아우른다.

이길범은 수원에서 <성묵회>를 결성하고 조직을 이끌었다. 고향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이길범은 수원에서 <성묵회>를 결성하고 조직을 이끌었다. 고향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이길범은 화가로서 정규 교육을 받은 이력이 없다. 이당 김은호 선생 곁에서 그림을 배웠다. 화가로서 업적도 개인적 삶도 화려함이 없다. 그러다 보니 화가로서 특별한 전성기도 없었고, 화단에서도 알려진 것도 미미하다. 실제로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도 인물 정보를 찾을 수 없다. 

  <정조 어진>은 화가 이길범의 이력을 단숨에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다. 그리는 일을 숙명처럼 여기고 주어진 현실에 묵묵히 견뎌온 인생이 여울진다. 인생 전체를 저당 잡힌 그림 감옥에서 탈출하며 이룬 대작이다.

이길범의 그림을 다양한 연령층이 보고 있다.

이길범의 그림을 다양한 연령층이 보고 있다.


 어진을 그리는 것은 개인적으로 영광스러운 순간이지만 한편으로는 부담도 많은 작업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임금의 얼굴을 완성해야 한다. 그림을 완성하는 시간은 제한적이었겠지만, 화폭에 앉기 전부터 그 여정은 고독하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런 시간을 이겨내고 완성한 것이 <정조 어진>이다.

 <정조 어진> 앞에는 관람객들이 제법 몰려 있다. 관람객들은 숨죽인 듯이 보고 있지만, 내면에는 작은 소란스러움이 느껴진다. 화가의 상상력과 실재 인물처럼 다가오는 신비함에 아우성치는 숨소리다. 그림 앞에서 관람객들은 이길범을 향한 경외감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있다. 

이길범의 화단 이력을 볼 수 있는 소장품 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는 화단에서도 알려진 것이 미미하다. 실제로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도 인물 정보를 찾을 수 없다. 수원 미술계와 관련 단체가 나서야 한다.

이길범의 화단 이력을 볼 수 있는 소장품 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는 화단에서도 알려진 것이 미미하다. 실제로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도 인물 정보를 찾을 수 없다. 수원 미술계와 관련 단체가 나서야 한다.


 마음속에 그림을 들이는 일처럼 숭고한 일은 없다. 이번 수원미술관 전시도 며칠 동안 망설이다가 왔는데 감동이 몰려온다. 처음 발길이 힘들었지 이제 그림에 입문했다는 자신감이 든다. 그림을 보고 스스로 질문하고, 자아를 성찰하는 시간이 실존을 성장시키는 길이 되고 있다. 자기 방식대로 느끼고 생각할 때 좋은 그림이 자리한다. 그림뿐일까. 매사에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면 길이 열리지 않을까. 
윤재열님의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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