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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화성을 짓고 화성에 영원히 남다
보물 ‘채제공 초상화’ 등 유물 다수 화성박물관에
2020-11-14 16:15:56최종 업데이트 : 2020-11-16 14:57:48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번암 채제공의 초상화 등 유물 1,854점이 지난 10월 22일에 수원화성박물관에 기증됐다. 채제공의 후손들이 번암 탄생 300주년(1720년 생)을 맞아 보물로 지정된 초상화 등 소중히 보관해 오던 유물을 기증한 것이다.

기증 유물 중에 보물 제1477-2호 <채제공 초상 금관조복본>과 보물 제1477-3호인 <채제공 초상 흑단령포본>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2006년 채제공 후손이 기증해 현재 수원화성박물관에 있는 보물 제1477-1호 <채제공 초상화(시복본)>과 관련이 있다. 이 세 그림은 한 인물의 다른 복장 초상화다. 따라서 동시에 보고 비교, 연구 등을 하기에 편하다. 함께 있다는 것은 그 가치도 자연스럽게 더 높아질 것이다.

초상화가 보물로 지정되고, 오늘날까지 전하는 유물은 제법 많다. 그런데도 채제공의 초상화는 3점 모두 의미가 있다. 동일 인물의 장년기와 노년기의 모습이 있어 흥미롭다. 초상화에 나오는 복식이 모두 다르며 의관이나 기물이 화려하다. 의복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금관조복본 초상화는 흥선대원군의 초상화와 비교된다. 금관조복본 초상화 자체가 몇 점 안 전하는데, 두 그림은 복식에 비교가 돼 중요한 자료다. 
수원화성박물관에 있는 보물 제1477-1호 <채제공 초상화(시복본)>.

수원화성박물관에 있는 보물 제1477-1호 <채제공 초상화(시복본)>.


2호 금관조복본 초상화는 채제공 65세 때다. 3호는 흑단령포본 초상화로 72세 때의 모습이다. 1호 시복본 초상화는 그림에 73세 때라는 채제공의 자필 기록이 있다. 모두 전신상이지만, 2, 3호는 의자에 앉아 있고, 1호는 의자 없이 바닥에 앉아 있다. 모두 시선이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채제공이 뚜벅뚜벅 걸어 나올 것처럼 생동감이 있다.

1호는 오른쪽 위에 '화자 이명기'라고 밝혀 놓았다. 이명기는 정조 어진을 그린 당대의 최고 화가다. 그런 화가가 재상 채제공을 그렸다는 것은 정조의 극진한 배려가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2호는 누가 그렸는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얼굴 모습이며, 옷 주름의 표현, 바닥의 화문석 표현기법으로 볼 때 이명기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3호 역시 인물 표현과 화문석과 의자 배치 등으로 이명기가 그렸을 것으로 본다.

3호는 초상화만 있지만, 1호 시복본 초상화는 유지 초본 3점과 보자기와 함도 함께 남아 있다. 2호도 함이 있다. 보자기와 함도 초상화와 함께 일괄 보물로 지정됐다. 임금의 초상화 초본은 성스러운 것이어서 불에 태우거나 모두 없애는 것이 원칙이다. 공신들의 초본도 그림이 완성되면 대부분 폐기된다. 이때 초상화의 주인공이 간직하는 경우도 있다. 채제공의 초상화 초본도 주인공에게 전해지고 가문에서 보관하여 오늘날까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채제공 초상화는 누비보와 보자기, 보관함까지 있다. 초상화 유지 초본도 전한다. 밑그림부터 정본까지 작화 과정을 다 알 수 있다.

채제공 초상화는 누비보와 보자기, 보관함까지 있다. 초상화 유지 초본도 전한다. 밑그림부터 정본까지 작화 과정을 다 알 수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김세영 학예연구사는 "채제공 초상화는 당대 유명 화가가 그린 것은 물론 사대부의 초상화로 한 인물에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 밑그림부터 정본까지 작화 과정을 다 알 수 있다는 것, 어떻게 포장돼서 전승되었다는 것 등 다른 초상화와 차별되는 점이 있다. 그리고 함께 기증된 고서 유물, 가문 관련 고문서 등도 학술 가치가 높다. 우리 박물관은 기증받은 유물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보존·관리하고, 시민에게 공개할 준비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당시 초상화는 그대로 그리는 거로 생각했다. 사모 밖으로 나온 머리카락 수, 얼굴의 주름, 수염 형태와 수, 얼굴의 흉터 자국까지 자세히 그렸다. 사실을 그대로 그리는 생각은 주변 세계를 객관적이고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태도를 보이게 한다. 사실적 근거에 판단하는 습관은 보기 싫은 현실이나 불편한 진실도 직시하는 현상을 만날 수 있다. 사실 대로 그리는 초상화는 이런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초상화는 겉모습은 물론 내면의 성품까지 담았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일생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초상화를 보면 살아온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채제공의 초상화에서도 그런 면이 생생하게 보인다. 사모의 무늬까지 섬세하게 그렸고, 풍성한 주름도 보인다. 특히 눈동자가 서로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다. 채제공이 사시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인물의 치명적인 약점일 수도 있는데 숨기지 않고 그렸다. 오늘날 우리가 사진을 찍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예쁘게 고치는 것과 다르다.
10월 22일 번암 채제공 후손 소장 유물 기증식 장면.(수원시청 홈페이지 사진 활용)

10월 22일 번암 채제공 후손 소장 유물 기증식 장면.(수원시청 홈페이지 사진 활용)


조선 시대 초상화는 왕뿐만 아니라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 승려, 사대부라고 하는 양반들의 부부까지 다양하게 그렸다. 공신들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특전 중 초상화 제작이 가장 으뜸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초상화를 갖는 것은 가문 대대로 자랑거리였다. 어디 그뿐일까. 조선의 미인도 중 최고의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는 기생으로 추정되는 여인의 초상화다. 혜원이 지금이야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저 저잣거리를 전전하던 이름 없는 무명 작가였다. 이렇게 볼 때 일반 백성도 초상화를 그렸지만 전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화폐 속에도 이순신, 세종대왕, 퇴계, 율곡의 초상화를 넣어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초상화를 좋아하는 민족이었음이 틀림없다.

번암은 충남 홍주(현재의 청양)에서 태어났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관련 유물도 보물 등 중요 문화재다. 충분히 국립박물관 등에 기증하면 더 주목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번암 가문은 수원화성박물관을 택했다. 이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번암은 정조의 개혁정책을 잘 이끈 재상이었다. 수원화성 축성의 총책임자인 총리대신으로 역할을 했고, 초대 화성(수원) 유수를 지냈기 때문이다.

이제 수원화성박물관은 이름에 걸맞은 유물을 지내게 됐다. 지방자치단체로서 문화재의 도난, 망실, 훼손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물론 연구와 전시를 통해 문화재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이번 기증에 만족하지 말고 화성 관련 문화재 연구와 발굴을 통해 우리 문화창달에 이바지해야 한다. 채제공 후손들이 가문의 귀중한 유물을 지역박물관에 기증한 것도 수원시와 박물관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원시와 박물관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느낌이다.

채제공, 수원화성, 정조, 채제공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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