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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있어 더 애착이 가는 화성의 암문
독창성과 과학성을 갖추고, 성곽과 절묘하게 어울려
2021-10-18 10:13:27최종 업데이트 : 2021-10-18 10:13:19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서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다. 문 주변은 구운 벽돌을 이용해서 쌓았다.

서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다. 문 주변은 구운 벽돌을 이용해서 쌓았다

 

화성을 돌 때, 팔달산에서 시립중앙도서관 뒷길로 오르기도 한다. 팔달산 지석묘군을 지나고, 화성 돌을 뜨던 채석장을 볼 수 있다. 이 길이 험하기도 한데 바로 능선에 오르면 숲을 거닐 수 있다. 등산의 맛도 있고, 숲 향기도 느낀다.

이 길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 서남암문이다. 서암문의 남쪽에 있다는 뜻이다. 서남각루로 나가는 암문으로 용도의 출입문이고, 화양루의 통로가 된다. 이곳은 팔달산에서 비교적 높고, 능선도 가파르다. 서남 방향을 보기 편해 5개 암문 중 유일하게 포사를 설치했다. 이곳에서 적을 감시했다. 하단은 돌로 쌓고, 홍예는 벽돌로 만들었다. 암문 중에 지상에 만들어졌고, 비교적 큰 문이다.  

서남암문은 성의 샛문이지만, 주변 지형으로 볼 때 당시에 백성들이 드나들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관광객이 접근하기 힘들다. 반대로 화성에서 높은 곳에 있으니 성 밖의 상황을 관찰하기 쉽다. 그래서 포사를 설치했다. 여기서 화성 전체를 볼 수 있으니, 군사들이 깃발을 흔들며 성 전체에 위험을 알릴 수도 있다. 


북암문은 성 밖의 백성이 가장 많이 이용했을 것이다. 지금도 주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등하굣길에 이 문으로 드나든다. 이 문을 나서면 용연의 아름다운 광경도 본다.

북암문은 성 밖의 백성이 가장 많이 이용했을 것이다. 지금도 주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등하굣길에 이 문으로 드나든다. 이 문을 나서면 용연의 아름다운 광경도 본다.


3·1 독립운동 기념탑을 지나고, 서장대 방향으로 가면 서암문을 만난다. 서장대 남쪽 44보 거리에 있다. 경기도청 뒷길에서 약수터를 지나 올라오면, 이곳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온다. 서암문은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다. 문 주변은 구운 벽돌을 이용해서 쌓았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만들었기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는 문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춰져 있다. 

암문은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한다. 하지만 서암문은 경사가 가파른 지형에 있어서 어려웠을 것이다. 대신 서암문은 행궁에서 가장 가깝다. 비상시 행궁에서 나간다면 서장대 쪽으로 올라 이 문으로 나갈 수 있다. 외부에서도 눈에 띄지 않아 비밀 통로로 이용했다. 방화수류정에서 동장대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작은 문이 있는데, 이것이 북암문이다. 북암문은 밖에서도 잘 보인다. 북암문은 성 밖의 백성이 가장 많이 이용했을 것이다. 지금도 주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등하굣길에 이 문으로 드나든다. 이 문을 나서면 용연의 아름다운 광경도 본다. 돌로 기본 자리를 놓고, 벽돌로 정교하게 쌓았다. 

 
동암문은 평지보다 낮은 곳에 문을 냈다. 동암문은 25개의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이 계단은 안에서 쉽게 통로를 폐쇄할 수 있는 구조다.

동암문은 평지보다 낮은 곳에 문을 냈다. 동암문은 25개의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이 계단은 안에서 쉽게 통로를 폐쇄할 수 있는 구조다.


북암문 위에는 둥근 모양의 원여장이 있다. 전투하는 병사 배치를 고려해, 원형 여장 시설을 했다. 원여장은 보통 사람 키를 훨씬 넘는다. 북암문 위 통로에 병사가 선다면 여장으로 숨을 수 있다. 여기서 적의 상황을 살피며 방어전을 펼친다. 동암문도 원여장이 있다. 암문 중 이 두 곳만 여장을 설치했다. 원여장 없이 옆 성곽과 같게 평면으로 여장을 만들면 공사도 쉽다. 그런데도 이렇게 한 이유가 있다. 원여장에서는 성 밖을 넓은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전쟁할 때도 바깥 상황을 잘 볼 수 있다. 원여장은 단순히 보기 좋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이처럼 전쟁을 효율적으로 하는 시설이다. 

암문은 적의 침입이 있을 때 흙으로 막으면 통로를 폐쇄하고 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를 고려해 서암문, 동암문은 평지보다 낮은 곳에 문을 냈다. 동암문은 25개의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흙을 꽤 많이 부어야 한다. 참고로 서암문은 14개의 계단을 내려간다.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흙으로 막을 수 있다. 남암문은 팔달문과 남수문 사이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일제강점기 당시 도로를 내면서 철거됐다. 화성성역의궤 기록에 보면, 성안 주택가와 성 밖 장터 사이 한가운데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암문의 취지에 맞지 않는 문이었다. 성벽에다가 돌로 홍예를 설치하였고, 제도는 성의 사대문과 같이하였으나 약간 작게 하였다. 다른 암문보다 비용(4,287냥 8전 3푼, 나머지 암문은 1,712냥~1,107냥 내외)도 많이 들었는데, 크기(남암문은 너비 3보, 동암문 너비 1보 2척, 북암문 1보, 서암문 1보 1척, 서남암문 1보 2척)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서남암문. 이 문은 용도의 출입문이기도 하다. 암문 중에서 유일하게 포사가 설치되어 있다.

서남암문. 이 문은 용도의 출입문이기도 하다. 암문 중에서 유일하게 포사가 설치되어 있다.


성에는 당연히 문이 있다. 화성에도 4 대문이 있다. 대문은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보는 사람들은 그 크기에 압도당한다. 국가적 행사가 있거나, 신분이 높은 관리가 행차를 할 때는 이 문을 이용했다. 그때 신분이 낮은 백성은 문을 이용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때 자유롭게 이용하는 문이 암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암문에도 군사를 파견했다. 남암문과 서암문은 각각 60명, 동암문, 북암문은 각각 40명 배치했다. 남문과 북문은 각각 100명, 동문과 서문은 170명, 4개의 각루는 각각 50명 배치와 비교할 때 제법 중요한 군사 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암문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두어서 적들이 알지 못하도록 했다. 말 그대로 은밀한 문이다. 그렇다고 문을 함부로 만들지는 않았다. 고급 자재인 벽돌을 사용하고, 멋진 원형 여장으로 치장했다. 문도 폭 1.5m 내외, 높이가 1.8m 내외다. 여기에는 정조의 철학이 담겨 있다. 암문은 전쟁 때보다 평소에 백성이 많이 이용했다. 이것을 고려해 벽돌 등을 이용해 내외 홍예형 구조로 섬세하게 만들었다. 정조의 실용 정신과 애민 정신이 함께 담긴 시설이다. 그리고 화성의 암문은 전쟁에 대비해서 지형 여건에 맞는 설치를 했다. 암문 위에 원형 여장 등을 설치한 것도 모두 과학적 건축을 고려한 문이라고 봐야 한다. 

오늘날에도 암문은 사람들이 많이 지난다. 성곽을 오를 때 굳이 사대문을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가까운 암문으로 들어가면 편하다. 비록 작고 화려하지 않지만, 접근성이 있고, 실용적인 문이다. 암문은 대문과 기타 성곽 구조물에 비해 작고 하찮은 느낌이 있다. 그래서 관광객도 눈여겨 살피지 않는다. 하지만 문화재를 웅장하고 고급스러운 것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문화재는 상상력으로 느껴야 한다. 유홍준 교수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했는데, 상상력을 발휘하면 더 많이 보인다. 상상력이 없는 문화재 체험은 박제된 유물을 보는 것이다. 선조들이 좁은 암문으로 드나들며 삶을 이어갔던 일을 상상해 보라. 박물관에서 고려청자를 보는 느낌에 버금가는 감동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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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암문, 북암문, 남암문, 팔달산,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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