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효행길을 걷다가 만석거에서
정조대왕 능행차로 넓이가 궁금해요
2020-10-13 08:44:07최종 업데이트 : 2020-10-13 08:44:04 작성자 : 시민기자   한정규
수원화성 축성 중이던 1795년 봄에 축조한 만석거

수원화성 축성 중이던 1795년 봄에 축조한 만석거



수원을 상징하는 숫자는 8이라 할 수 있는데 팔달산, 사통팔달, 수원8경 등이 있다. 8이란 숫자는 동양에서 오랜 기간 긍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수원의 구석구석을 연결하고 수원의 역사, 문화, 생태하천, 자연을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한 길이 8색 길이다. 8색 길을 모두 걸으면 수원을 어느 정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8색 길 중에서 지지대고개부터 현륭원 가는 길을 효행길이라고 한다. 이 길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러 왕래하던 길이기 때문에 효행길이란 명칭이 붙었다.

현륭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던 길에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행차를 지체해 붙여진 '지지대', 행차로에 소나무를 심어 오늘날 노송지대가 된 길, 행차로의 이정표였던 표석과 장승, 만석거 등 역사적 스토리가 풍부하고 정조대왕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정조대왕의 행차는 지지대고개를 넘어 현재 프랑스군 참전기념비 앞 광교산 방향 노송길을 따라왔다. 괴목정교를 지나 1번 국도를 가로질러 노송지대, 파장동 길, 만석거로 이어졌다.

 

수원화성 축성 중이던 1795년 봄에 축조한 만석거, 남수문 모습의 다리

수원화성 축성 중이던 1795년 봄에 축조한 만석거, 남수문 모습의 다리

 

수원화성 축성 당시인 1794년 전후에 전국적으로 가뭄이 심했다. 정조대왕은 수원화성 축성 공사를 일시 중단하고 장안문 북쪽 지역인 황무지를 개간해 둔전을 조성하고 저수지를 축조했다. 그 저수지가 바로 1795년 봄에 축조한 만석거이며 둔전은 국영농장이었던 대유평이다. 한글 정리의궤에 의하면 화성 축성 내탁에 필요한 막대한 흙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만석거는 둘레가 1,022보(1,198m), 깊이는 얕은 곳이 7척(2.6m), 깊은 곳이 11척(4.1m), 제방의 길이가 725척(269m), 밑의 두께가 52척(19.3m), 위는 줄어들어 너비가 17척(6.3m) 남짓이고 모두 포백척(37.15cm)을 사용했다. 제방의 남쪽은 흙 낭떠러지에서 시작해 북쪽은 돌 낭떠러지에서 끝난다. 돌 낭떠러지의 돌을 파서 물이 들어오는 입구를 만들어 물을 끌어내리는 길과 통하게 하였고 나무다리를 걸쳐놓아 여의교라고 했다. 다리의 너비를 방죽 등허리와 나란히 하여 그대로 가마길을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수원화성 축성 중이던 1795년 봄에 축조한 만석거, 노송길

수원화성 축성 중이던 1795년 봄에 축조한 만석거, 노송길


가마길이란 정조대왕의 행차로를 말한다. 정조대왕 능행차 당시에 도로의 폭을 알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정조대왕 당시 수원화성 축성 연간에 사용한 도량형을 보면 1주척(19.54cm), 1영조척(30.85cm), 1포백척(37.15cm), 1보(3.8영조척, 117.23cm), 1파(5영조척, 154.25cm), 1지척(25.7cm), 1리(360보, 422m) 등을 사용했다.

정조대왕 능행차 길이었던 배다리 폭(24척, 7.4m), 시흥대로(신작로 폭 24척, 7.4m), 만안교(22자, 6.8m), 만석거 제방(17척, 6.3m), 노송지대 폭(실측, 7m) 등을 보면 6.3m ~ 7.4m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약간의 오차가 있기는 하지만 수원화성을 실측한 데이터를 수학적으로 계산한 값이기 때문에 정확도는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정조대왕 능행차와 반차도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다.
 

수원화성 축성 중이던 1795년 봄에 축조한 만석거, 제방은 왕의 행차로였다.

수원화성 축성 중이던 1795년 봄에 축조한 만석거, 제방은 왕의 행차로였다.



만석거를 축조한 후 가을에 만석거 남쪽 언덕에 영화정을 세웠다. 1796년 봄에 수원을 방문한 정조대왕은 주필하던 곳은 지지대, 저수지는 만석거, 들판은 대유평, 수문 위 다리는 여의교, 뽕을 심은 들은 관길야, 정자는 영화정이라 명명했다. 영화정 편액과 만석거 표석은 화성유수 조심태, 여의교 표석은 홍원섭, 대유평 표석은 이유경이 각각 써서 세우라고 명하고 어제 시 현판을 영화정에 걸게 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만석거에 있는 영화정

만석거에 있는 영화정


현재의 만석거는 원래 축조 당시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제방의 위치가 바뀌면서 여의교가 사라지고 수문의 원형도 알 수 없으며 영화정도 다른 곳에 복원했다. 공원으로 개발하면서 둘레길을 만들어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지만 만석거 고유의 정체성은 잃어버리고 있다. 만석거와 영화정의 역사적인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한정규님의 네임카드

효행길, 만서거, 정조대왕 능행차, 한정규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독자의견전체 0

SNS 로그인 후,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icon 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