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마을 사랑방 같던 추억의 이발관
2021-06-30 16:25:18최종 업데이트 : 2021-06-30 16:25:14 작성자 : 시민기자   차봉규

노인을 이발하는 추억의 이발사

노인을 이발하는 추억의 이발사


사람들은 누구나 추억이 있다. 청소년 시절이나 젊은 시절에 살아왔던 일들이 나이가 들면 추억으로 남는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우리의 문화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수원역에서 버스를 타고 장안공원 방향으로 약 1.5Km쯤 가다 보니 옛날 이발관 위험 표시인 청, 홍색 줄이 그어진 유리통이 빙빙 돌아가고 있다. 도시에서는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간 옛날 남성 이발관이다. 이발사를 만나보면 옛 추억거리가 있을 것 같아 이발관을 찾아갔다.

이발관에 들어가 보니 때마침 노인 한 분이 이발을 하고 있다. 옛날 이발관에 다니던 추억이 떠올라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하니 주인이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기다리는 동안 내부를 둘러보니 벽에는 이용기능장, 대통령 표창장, 이용기술강사 위촉장 등 무려 6개의 상장이 걸려있다.


 

기능장

임종대씨의 헤어디자인 기능장


임종대 이발사는 머리는 희끗희끗한데 50대처럼 젊어 보였다. 나이를 물으니 57년생(만 64세)이라고 한다. 이발한지 50년이 넘었다고 했다. 집안도 어렵고 동생들도 많아 잠재워주고 밥먹여준 다고 해서 초등학교 졸업 후 바로 이발관에서 기술을 배웠다. 고향인 전남 남원에서 이발관을 하다 84년도 수원으로 이사 와 지금까지 운영한 횟수가 37년째란다. 그는 평생을 이발사로 외길인생 걸어오면서 세 딸들 키우고 대학을 마치고 큰 딸 출가를 시켰으니 앞으로 남은 인생도 이발사로 살 것이라고 했다. 

 

이발사가 되려면 임종대 씨처럼 열세네 살 때쯤 되었을 때 이발소에 취직을 한다. 옛날에는 무슨 일이든 기술을 배우려면 월급이란 게 없고 밥만 먹여줬다. 생계가 어려운 시절이라 그것만도 다행이다. 이발사가 되려면 몇 단계를 거쳐 배워야 이발사가 된다. 처음에는 수건도 빨고 청소 같은 자잘한 일들을 시키다가 머리 감기는 것을 가르친다.

 

다음에는 면도를 가리킨다. 면도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주인이 머리를 깎고 나면 면도를 담당한다. 이때부터는 반 기술자로 인정해 쥐꼬리만큼의 월급을 받게 된다. 다음에는 어른들의 머리 깎는 것을 배운다. 처음에는 나이 지긋한 촌노(村老)들의 머리를 깎으면서 이발 기술을 배운다. 농촌에서 일하는 노인들은 머리를 잘 깎고 못 깎고를 따지지 않는다. 그저 머리가 길으니 짧게 자르기만 하면 된다.

 

기계로 밑을 돌리고 머리빗을 위로 올리면서 가위로 다듬어나간다. 마지막으로 '고대'를 배운다. 고대는 어른 새끼손가락 굴기의 긴 쇠젓가락을 연탄불 구멍에 꽂아 벌겋게 달궈지면 물수건에 대고 식힌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빗으로 요리저리 제쳐가며 고대기로 머리 모양을 잡아간다. 고대기가 덜 식어 머리를 찌직하고 태워먹기도 한다. 그 시절에는 미장원에 여성들도 연탄불에 달군 고대기로 파마를 했다.

 

이발사가 되기까지는 그냥 배우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 기술자들은 곤조(성깔)라는 게 있다. 잘못하면 욕도 하고 주먹으로 머리통을 줘 박기도 하고 나가라는 소리도 듣고 온갖 못 들을 소리를 다 들어가며 몇 년간 시련을 겪고서야 이발기술을 배운다. 이렇게 수년을 걸려 배운 기술로 이발사 자격시험을 본다. 자격증을 따도 바로 이발관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발관 이발사로 취업해 몇 년간 기술을 좀 더 연마한 다음에 이발관을 차리기도 한다.



명맥을 이어가는 이발관

명맥을 이어가는 이발관
 

출입문 위에는 '고려 이발관' 간판이 걸려 있고 간판 옆에는 빨간색과 파란색 두줄이 그려진 1m쯤 길이의 둥근 유리통이 빙빙 돌아가고 있다. 파란색은 정맥, 빨간색은 동맥이라는 사람의 핏줄을 의미한다.  또한 면도할 때 예리한 칼을 쓰기 때문에 피를 흘릴 수 있다는 위험 표시기도 하다. 간판을 보지 않고도 멀리서도 이발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지금은 남성들의 '이발관'이나 여성들의 '미장원'이라는 전용 간판이 사라진 지 오래다. 다양한 외래어 명칭의 간판들을 내걸려 있다. 여성들이 운영하는 남성 전문 미용실도 있고 남성들이 운영하는 여성 전문 미용실도 있다. 불과 20여 년 사이 변화된 사회 풍조다. 20여 년 전 필자가 수원에 이사 와 이발관이 없어 난생 처음으로 여성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이발을 하기 시작했던 모습이 기억났다. 

 

요즘에도 젊은 남성들이 이발기술을 배우러 오는지 묻자 "지금은 여성들이 남성 이발기술을 배워 남성 전문 미용실을 운영하기 때문에 일반 남성들은 직업에 대한 확신이 없어 배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부 배우는 남성들은 여성 미용기술을 배워서 여성 미용실을 운영하는데 남성들이 이발하러 오기 때문에 이발기술을 배우러 오는 정도라고 한다. 

 

20여 년 전만 해도 지방에는 남성들만 머리를 깎는 이발관이 있었고 여성들만 파마를 하는 미장원이 따로 있었다. 이는 공자의 유가 사상(儒伽思想) '남녀 칠 세 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이라는 전통 사회의 관행 때문에 남녀가 유별(有別)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남성 이발관에 여성 면도사들이 출연하기 시작했고 이발관마다 경쟁적으로 여성 면도사를 채용했다. 남성 이발사들의 투박한 손으로 면도를 하다가 여성 면도사들의 유연한 손길로면도를 하니 면도칼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게 끝났다. 또 면도가 끝나면 머리, 어깨, 양팔 암마를 해주고 귀지개로 귀 청소까지 해주니 스르르 잠이 들기도 했다. 여성 면도사들의 서비스 때문에 한 달에 한번 오던 손님들이 자주 오는 손님들도 생겼을 정도다.


이발소나 미장원은 머리나 깎고 파마나 하는곳이 아니었다. 장날이면 면내는 물론 타 지역 사람들까지 와서 머리도 깎고 파마도 한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눈다. 그러다 보니 면내뿐만 아니라 군내 소식까지 다 듣는다. 이발사나 미용사는 통신원들이었고 '이발관이나 미장원은 주민들 사랑방 같은 소통의 장소'였다. 지금의 남성 미용실에 가보면 면도는 아예 없고 머리 감는 것도 셀프다. 소통은 없고 불통으로 앉아서 머리만 깎고 나온다. 수원에서 언제 사라질지도 모를 옛 이발관이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

차봉규님의 네임카드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독자의견전체 0

SNS 로그인 후,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icon 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