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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소시효가 지난 '절도범'들이었다
2012-11-03 00:24:27최종 업데이트 : 2012-11-03 00:24:27 작성자 : 시민기자   유병화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예나 지금이나 늘 통용되는 말이 있다면 '등 따습고 배 부르면 그게 최고'라는 말 아닐까.
하지만 어렵게 살던 예전에는 배부르기도 힘들었지만 등 따습기도 참 어려웠다. 그중에서도 시골에서 농사짓는 살림에 읍내로 나와 혼자 밥 해먹어 가면서 학교 다니던 자취생 시절, 그시절에 그런 경험 해보신분들은 당시 자취생들의 애환이 어떤건지 잘 아실것이다.

특히 추운 겨울철에는 더욱 더.
80년대 초반, 스포츠형 까까머리에 교복을 입던 시절에 시골서 태어나 자란 촌놈들이 도회지로 나와 학교를 다닐때 우리는 그걸 '유학'이라고 불렀다. 도시로 유학 나온 가난한 촌놈들에게 하숙은 언감생심, 전부다 자취를 했다. 그때 자취방 월세가 3만원씩 할때니까 지금과는 세월이 참 많이 다른 때였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고딩시절을 보낸 지금의 40대 중반이상 중년들은 당시 대학가요제 환상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 대학가요제는 정말 대단했다.  김만준이 '모모'를 부르고,  1980년 대학가요제에서 이범용 한명훈 듀엣이 통기타를 치며 '꿈의 대화'를 불렀다. 홍서범의 옥슨80이 '불놀이야'를 부르고, 그저 돌아서면 등 뒤에서 누군가 한줄기 주르륵 눈물을 흘려줄것 같은 배철수의(활주로) '빗물'도 그때 노래였다.

공부보다도 가요제에 나가기 위해 대학을 가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악기 좀 다룰 줄 아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대학가요제에 나가 노래를 부르는 환상에 빠졌던 고등학교때였다. 
단짝이었던 우리 친구 4명도 대학에 가면 가요제에 나간답시고 노래에 푹 빠져 있었다.

다시한번 회상컨대 대학에나 가서 준비해도 될 일을 대학도 안간 주제에 대학가요제 나갈거라고 악기를 두들겨 댄 우리도 참 '한량'들 이었다. 그땐 대학 가기도 참 힘들때였었기에 더욱 그랬다.
악기를 배우기 위해 학원 다니랴, 대입시 준비하랴 나름대로 바쁘게 고3을 보내던 그해 겨울, 당시 학력고사(지금의 수능시험)를 마치고 한참 춥던 어느날이었다.

학교에서 유난히 좀 먼데서 자취하던 현수가 음악연습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은 더구나 녀석의 생일이었기에 우리는 가지고 있던 용돈 탈탈 털어서 케잌까지 준비하고 기다렸건만 녀석은 밤늦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니 우리는 급기야 버스를 타고 녀석의 자취방으로 찾아갔다.

"현수야" 부르며 방문을 연 순간... 앗! 녀석이 방 한 구석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게 아닌가.
아주 극심한 독감에 걸렸는데 연탄이 없어 방은 얼음짱같이 차가왔고 녀석의 이마를 만져보니 완전히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 한겨울에 벌써 4일째 냉방에서 지냈다는 것이다. 연탄이 떨어졌는데 돈이 없어서 서지를 못했고, 그냥 참다가 고향으로 내려갈거라며 그때까지 버틸 생각이었다나?

몸이 그 지경이었는데도 이놈은 친구들한테 신세지고 싶지 않아서였다며 말한마디 안했던 것이다.  기가 막혔다. 
부엌으로 나갔더니 부뚜막 한쪽에 절반은 쪼개져 쓸모가 없는 연탄 한 장이 거미줄을 뒤집어쓴채 맥없이 놓여져 있었다.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일단 집밖으로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문이 없는 바로 옆집 담벼락에 연탄이 수북히 쌓여있는게 보였다. 그때는 그랬다.

우리는 공소시효가 지난 '절도범'들이었다_1
우리는 공소시효가 지난 '절도범'들이었다_1

우리 셋은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그 연탄이 우리것인양 몇장을 들어 날랐다. 당시 골목에 가로등도 없었고, 인기척도 뜸한 늦은 시각이라 '연탄 도둑질'은 생각보다 쉬웠다.  우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골목 일대를 돌기 시작했다. 대문 옆이나 담장 근처에 쌓아놓은 연탄이 꽤 있어서 집집마다 다니며 서너장씩 '자리 바꿈'을 실시한 것이다.

난생 처음 해보는 도둑질(?)이었지만 순식간에 익숙해졌다. 들킬까 두렵기는 했지만 친구가 얼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리는 잠시 양심을 천지신명께 맡기고 부지런히 밤 골목길을 누볐다. 도둑질 한다는 긴장감 때문에 온몸이 땀에 젖는것도 모른채였다. 입고 있던 옷가지가 시커먼 연탄가루로 채색이 됐다는것을 느꼈을때쯤 한놈이 "야, 됐다. 이정도면 보름은 땔수있을거다"라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을 가로저을 때에서야 비로소 멈췄다. 그때 연탄 서리로 훔친게 아마도 20장은 됐을 것이다. 

"얌마, 너 바보 아냐? 얼어 죽을라고 환장했냐!"
약국에서 사온 감기약을 먹이며 이구동성으로 현수에게 면박을 주자 녀석은 그냥 피식 웃기만 했다. 
"생일선물로 케잌 사왔다. 근데 부엌에 있는 연탄은 가난한 유학생 촌놈을 위해서 동네 아줌마들이 너도나도 서너장씩 기증하신거다. 나중에 갚어라"라며 명철이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후 우리 넷중 두녀석이 대학에 진학을 못했다. 나중에 재수해서 모두 대학에 가긴 했지만 대학가요제 출전 꿈은 이루질 못해 결국 그때 일은 아스라한 추억이 되고 말았다.
어렵고 가난하게 살던 시절, 연탄 한 장도 꽤나 소중했던 그때에 우리 때문에 연탄 서너장씩 도둑맞은 주인분들께 정중하게 사죄드리고 싶다.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일이긴 하지만. 변명하자면 그때의 절도범(?)들은 '개과천선'을 해서 지금 가정을 꾸리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열심히 사는 중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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