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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과 함께한 부안 문학기행
2012-10-22 02:59:37최종 업데이트 : 2012-10-22 02:59:37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지난 20일 (사)한국경기시인협회와 국제PEN 한국본부 경기지역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2012 가을 문학기행-전북 부안'에 다녀왔다. 
시인도 수필가도 아니요, 더더욱 소설가도 아닌 시민기자는 단지 '문학을 흠모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면서 한국경기시인협회에 접수를 했다. 다행히도 지난해 초여름 '신록 詩낭송 대축제'에 참여한 인연이 있어서 답사 내내 자연스럽게 문인들의 뒤를 좇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정해져 있는 시간은 단 하루다. 
이에 주최 측은 한국에서 가장 목가적인 시인으로 알려진 부안 출신 시인 신석정을 기리는 '신석정 문학관'과 서해제일관음기도도량으로 소문난 '내소사'를 일정으로 잡았다. 사실 부안은 반계서당, 이매창 묘, 서외리 당간, 동문안·서문안 당간, 간재사당, 채석강, 청자박물관 등 문화유적지가 즐비하지만 부족한 시간으로 인하여 다음으로 미뤄야했다.

문인들과 함께한 부안 문학기행_2
곰소염전

송도삼절이 있다면 부안에도 삼절이..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매창의 묘에는 다녀왔어야 했다. 시간의 부족으로 가볼 수 없음이 너무 아쉬웠다. 신석정 시인은 송도에 삼절(三絶-기녀 황진이와 서경덕 그리고 박연폭포)이 있다면 부안에도 삼절이 있다고 했다. 명기 매창과 그의 정인이었던 유희경 그리고 직소폭포라고.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너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허난설헌, 이옥봉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꼽히는 부안의 명기 매창! 
그녀가 지은 다수의 시들 중에서 이별가의 으뜸으로 치는 이 작품은 목숨처럼 사랑한 한 남자와의 이별이 있었기에 탄생됐다. 
매창의 첫사랑이자 평생의 정인으로 여겼던 천민출신 유희경. 그는 당시 최고의 문인이었고, 임진왜란 후 공을 세운 대가로 면천되어 고위관직에 오른 인물이다. 
매창은 신분의 굴레로 인한 동병상련을 느끼며 단박에 그와 사랑에 빠진다. 이후 또 한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받고 결국 38살에 병을 얻어 요절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힐링(healing)의 대상이기도 한 '첫사랑', 매창의 맹목적인 첫사랑은 마지막 사랑이기도 했다. 그녀는 매화에 비치는 달그림자처럼 절개 있는 삶을 살다갔다. 그녀와 정신적인 사랑을 나눈 10년 지기 허균도 매우 슬퍼하며 헌정시 2편을 남겼다는데... 
2001년 문을 연 매창공원 내 매창의 묘! 죽어서 더 전설이 되어버린 그녀와의 만남은 후일을 기약한다.

부안엔 신석정 문학관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남도답사일번지로 강진과 부안 중에서 어디를 우선으로 정해야할지 한참이나 갈등했다한다. 
강진에 다산 정약용이 있다면 부안엔 반계 유형원이 있고, 무위사와 백련사 VS 내소사와 개암사 등 비교를 했다. 이어 강진이 김영랑을 낳았다면 부안은 신석정이 있다고 했다. 

문인들과 함께한 부안 문학기행_1
'신석정 문학관'에서

그랬다. 1930년대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고 주로 전원적인 시를 쓰며 만해 한용운을 멘토로서 모시면서 많은 영향을 받은 신석정(1907~1974)시인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친일시를 쓰지 않은 절개있는 시인이었다.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 
신석정 문학관으로 들어서면 제일먼저 만나는 글귀다. 평생 시인이 좌우명으로 삼았던 이 글귀는 '뜻이 높은 산과 흐르는 물 즉, 자연 뜻에 있다'는 뜻인데 자연귀의가 아닌 현실에서 지조를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기개로서 '침묵과 숭고'를 의미한다.

1924년 조선일보에 '소적'이란 필명으로 부안의 풍경시 '기우는 해'를 발표한 뒤 '선물(1931)'로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촛불', '슬픈 목가', '빙하', '대바람 소리' 등 수많은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중 다수는 고향 부안으로 낙향 후 초가 삼칸 '청구원(靑丘園)'에 기거하며 일제말기에 집필했던 시다. 초기엔 고향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목가적 시인으로, 후기엔 자연서정에 더한 역사적 시대정신까지 밝히면서 목가적 민족 시인으로 불린다.

남양주, 부천, 인덕원, 일산, 포천 등 경기도 전역에서 모여든 문인들은 오가는 차안에서 신석정의 시와 문인들 자신의 애창시를 낭송했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임께서 부르시면',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슬픈 구도', '가슴에 지는 낙화소리'까지 석정의 詩가, 그리고 김소월의 '초혼',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등 다양한 가슴속 노래들이 때론 비장함으로 때로는 아련한 추억의 되새김질로 울려 퍼졌다. 문학기행 중 보너스 같은 즐거움이다.

모든 일이 소생하게 하소서

'서해제일 관음기도도량'이라는 내소사 천왕문에 들어서려면 먼저 전나무 숲길과 만난다. 올 여름 잦은 태풍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여기저기서 뿌리까지 뽑힌 채 참혹한 상태로 탐방객을 맞는다. 이 길은 속세의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주고 마음까지 치유해주는 길로서 사유의 통로이기도 한데...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내소사(來蘇寺), '여기에 들어오시는 분은 모든 일이 다 소생하십시오'라는 혜구 두타 스님의 원력에 의해 백제 무왕 34년(633년)에 창건된 고찰이다. 
오랜 세월 중건과 중수를 거쳤지만 임진왜란 때에 대부분 소실됐다. 조선 인조 11년(1633)에 대웅보전과 인조 18년(1640) 설선당과 요사채 등이 중건되었다.

아! 그런데 가을 산사의 적요(寂寥)를 느끼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산자수명(山紫水明)의 경치를 즐기러 일부로 찾아든 것일까. 오가는 사람들이 겹겹이 쌓인 구름처럼 붐벼 전나무 향기 속 피톤치드 대신 먼지지만 일어난다. 누군가 옆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왕사(來往寺)'로 바꿔야 할 것 같다고.

그렇지만 딱 누각의 맞배지붕 봉래루까지만이다. 누각 아래를 통과해서 만나는 대가람은 이상향의 경지다. 높은 축대위에 펼쳐진 팔작지붕 대웅보전을 만나는 순간 그 기세에 마음과 몸은 붕 떠서 이미 천상으로 오르니 말이다. 능가산 곳곳에 펼쳐진 커다란 바위들은 위엄 갖춘 병풍이 되어 단청이 다 닳아진 세월의 무게마저 포근히 감싸 안는다. 

문인들과 함께한 부안 문학기행_3
팔작지붕이 한껏 나래를 편 '내소사 대웅보전'이 매우 호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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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과 함께한 부안 문학기행_4
유명한 내소사 대웅보전 꽃창살무늬

큰 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대웅보전 '꽃살문'에 눈길을 박는다. 풍상에 마모된 형상이 오랜 세월을 드러내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괘불재 만등공양'이 열린다는 포스터를 붙인 탁자를 지나 법당 삼존불에 시주하곤 한동안 꿇어앉았다. 그리고 후불벽화로 마음을 이끈다. '백의관음보살좌상!' 국내 남아있는 보살좌상으로는 가장 크다. 마음은 절로 펴진다. 이내 평화로워짐을 느끼며 천천히 법당을 나섰다. "모든 일이 다 소생하게 하소서!"

부안 문학기행에서 얻은 것들

부안으로 가는 길엔 억새와 갈대, 코스모스가 천지에 피었다. 간간이 콤바인으로 벼를 베는 농가의 바지런한 풍경과 미처 베지 않은 논들도 보인다. 돌아오는 길 어스름 저녁엔 샛노란 물감을 뿌린 유채 꽃밭인 양 어둠속에 황금색 빛이 반사되어 황홀했다. 

곧 있으면 내 나이 50줄, 나이 오십을 위한 몸과 마음의 검진이 필요한 시기다. 
자연의 섭리에 따른 가을풍경, 산사에서의 여유과 관조 그리고 포용력에서 위로와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 
시대를 밝힌 촛불 신석정 시인으로부터 시심을 찾는 시간이었다. 누림의 시간으로 인하여 눈은 맑아지고 몸은 가벼워졌다. 행복을 충전한 문학 기행이 되었다고 자부하며 총총 걸음으로 부지런히 집으로 향한다.

단감과 호박떡, 과자에 김밥, 심지어 요구르트까지 다양한 준비를 해오셔서 먹는 호사까지 두루 누렸다. 이 모든 것을 자분자분 준비하신 임병호 회장님과 임애월 사무국장님, 그리고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님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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