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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오랜 친구, 허수아비
2012-10-24 14:30:50최종 업데이트 : 2012-10-24 14:30:50 작성자 : 시민기자   홍명호
고향 마을 산허리 바로 아랫집인 태수네 산소 앞에는 시끌벅적한 늦은 벌초행사를 끝낸 집안 사람들의 울긋불긋한 옷차림이 단풍나무 색깔과 조화를 이루어 반짝거렸다. 추석이 3주일이나 지난 뒤 벌초를 했으니 늦은게 맞다.
태수네는 원래 추석 전에 벌초 계획이 있었으나 갑자기 집안에 큰 행사가 겹쳐 벌초와 함께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자  벌초를 추석 이후로 미뤘다는 것이다. 

태수네가 고향에서 항상 얘깃거리가 되는 이유는 마땅히 선산도 마련하지 못해 공동 산에 조상을 모셨지만 추석 몇주전쯤이면 외지에 나가 사는 6촌 8촌까지 죄다 모여 한바탕 잔치같은 벌초행사를 벌이고 갔기 때문이다.
그런 태수네가 추석이 임박해오는데도 벌초하러 나타나지 않자 동네 어르신들마저도 걱정 반, 궁금함 반으로 의아해 했던 터였는데 태수네 아주머니가 그런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자 평소 태수네 자식들의 효행과 행실을 익히 아는 마을 어르신들이 벌초를 대신 해주겠노라는 제안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태수네는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런 폐를 끼칠수는 없고, 추석이 지난 뒤에 할 것이니 염려 마시라고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주말. 고향에 가 보니 태수네 벌초행사장에는 정말 거의 3, 40명은 모인것 같았는데, 그 집을 볼때마다 마을 어르신들은 "벌초는 저래야 하능겨, 다 효자덜이지. 지 조상 위하는 눔 치고 집안 안되는꼴 못봤다닝께"라며 태수네 벌초를 칭찬하시느라 침이 마른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어서 크게 이름을 날릴 만큼 성공한 자식은 없지만 객지에서도 서로 의지하고 조그만 돈이라도 모아 열심히 살면서 고향에 내려왔다 가는 모습이 요즘 세상에 흔치 않아 참 보기가 좋다.

지난 추석 전에 우리 집안 벌초때에도 서낭당 산마루 넘어 첫 번째 집에 살던 민구네는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들까지 데려와 조그마한 봉분에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작은 아빠! 당숙!"하면서 구슬땀을 함께 흘리고 갔다. 
정말이지 요즘 도회지에는 핵가족으로 살다보니 고모, 이모, 삼촌에 큰 아빠는 알아도 여간해서 당숙이라는 호칭은 들어 보기도 힘든데, 그런 호칭을 쓰면서 다같이 모이는 우리의 아른다운 풍습은 늘 정겹고 반갑기 그지없다. 

어머니를 자전거에 태워드리고 길을 나섰다. 밭에 무를 뽑으러 가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옛날에 십여 리 길을 걸어 장을 보고, 광목 자루에 울룩불룩 붉은 홍옥이며 밤, 대추, 조기며 동태를 한 보따리 머리에 이고 가르마 같은 가을 들녘 길을 헤치며 집으로 오시곤 했다. 지금이야 아스팔트로 포장이 됐지만 예전에야 흙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길이었다.  
그랬던 이 길을 따라 이제 나는 성인이 되어 어머니를 뒤에 태우고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고향의 오랜 친구, 허수아비_1
고향의 오랜 친구, 허수아비_1

유년시절 나는 이 길가의 누런 벼가 고개 숙인 논을 홀로 지키는 허수아비 곁을 지나 방아깨비, 메뚜기, 풀무치 뛰던 길을 달려 온갖 맛난 것들 머리에 가득 이고 오실 어머니 마중을 갔다. 신나게 뛰는 발걸음 소리에 포르르 놀라 달아나는 새떼들…. 뛰던 발걸음을 멈추고 힐끔 뒤를 돌아보았지만 허수아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베어낸 벼 포기가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빈 논의 한가운데 서 있는 허수아비가 두 팔을 흔들며 방긋 웃는 게 아닌가! 아마 허수아비도 나처럼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다. 

영락없이 그랬다. 그 자갈 밭. 호미를 들고 나오시던 어머니 품에서는 늘 향기가 났다. 풋풋한 인정어린 어머니 고유의 향기, 밭에서 나온 곡식의 향기, 그리고 넉넉한 고향의 향기에다 새큼한 풀잎 향기까지....
그때도 '워이∼ 워이' 참새 쫓는 소리는 가을 들녘을 깨우고, 누렇게 고개 숙인 벼이삭 사이로 허름한 아버지의 옷을 입고 거기 논에 허수아비가 서있었다. 

허수아비는 온종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농부를 애태우는 얄미운 참새는 쫓지 않고 논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무표정하게 오는 이 가는 이 바라만 보고있을까? 
정녕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비록 소리는 지르지 못하지만 참새가 날아들면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노려 볼 것이다.  허수아비는 그저 헛 모양새만은 아니었다. 그토록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농군들과 함께 고향을 지켜준 고마운 친구였다.

지금, 벼를 베어 낸 빈 논에 낡은 옷을 걸치고 덩그러니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는 여전히 말이 없지만 고향을 그리는 객지 도시인들의 가슴에 여전히 남아있는 애잔함을 달래주는 묘약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고향 길가의 코스모스가 허수아비더러 손짓한다. 한들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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