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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의 가훈 백세청풍
2012-10-20 01:08:01최종 업데이트 : 2012-10-20 01:08:01 작성자 : 시민기자   이재령
내가 어렸을적 우리집에 달려 있던 커다란 목판을 기억한다. 그곳에는 百世淸風 仁義禮智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어릴때는 그게 뭔지, 무슨 뜻인지조차 몰랐고 중학교에 들어가 한문 공부를 하면서부터 그게 가훈이고, 무슨 뜻인지도 대충 짐작을 할수 있었다.

 
우리집의 가훈 백세청풍_1
우리집의 가훈 백세청풍_1

百世淸風 (백세청풍: 대대로 맑은 가풍을 유지한다) 仁義禮智 (인의예지: 인간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가지 덕, 곧 어짊과 의로움과 예의와 지혜)라는 말. 할아버지께서 만드신 가훈이고, 그걸 아버님 대에 이르러 그대로 두신거라 했다. 
요즘 한자를 잘 모르는 세대의 아이들이 보면 뜻은 고사하고 무슨 글자인지 잘 읽지도 못하겠지만 그때의 가훈은 이렇게 근엄하고, 뭔가 깊이있게 풍기는 이미지가 있었다. 물론 한글로 잘 풀이된 좋은 우리말 가훈이 이런 근엄한 가훈에 뒤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예전의 가훈은 대체로 이렇게 무거운 한자식의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집집마다 가장 많이 걸려있던게 누구나 다 아는 家和萬事成(가화만사성) 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요즘 주변 사람들의 집에 가 보면 '자랑과 사랑이 넘치는 집' '생각은 깊게, 행동은 바르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자"는 식으로 순 우리말로 된 가훈들도 많이 쓴다. 
무엇이건간에 가훈으로 올라온 말은 모두 다 우리 삶의 지표를 축약해 놓은 것들이기에 집안 가족 전체가 깊이 새겨 두어야 할 살아있는 명언이고 철학들이다.

며칠전 초등학교를 다니는 딸 아이가 학교에서 가훈을 적어 오랬다며 공책과 연필을 들고 왔다.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머릿속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만의 생각과 철학이 있기는 하지만 게으름 탓에 그걸 가훈으로 만들어 걸어 놓을 생각은 못하고 있었기에 아이가 가훈이라고 적어 달라며 내놓은 공책에 선뜻 뭔가 적어주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방목(放牧)이라고 적어줬다. 아이가 무슨 뜻이냐고 하길래 '자유스럽게 행동할수 있도록 풀어줌'이라고 알려줬다.
그동안 집안 어디에도 가훈을 적은 액자라도 걸어놓은적이 없다가 느닷없이 방목(放牧)이라고 하자 아내는 무슨 가훈이 그 모양이냐며 펄쩍 뛰었다. 아내가 생각하는 방목은 아마도 '짐승이 제멋대로 날뛰도록 놓아 먹이는 방목' 정도로만 생각한듯 했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썩 좋은 가훈 축에는 안드는 단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평소에도 나는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면 녀석들의 생활이나 서로간의 다툼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가끔 아내와 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학생들이 있는 집들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우리 집 또한 아수라장이다. 책상도 돼지우리를 방불케 할 정도로 어지럽혀져 있고, 제녀석들 방 곳곳 역시 지진이라도 난것처럼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치우지 않고 어지럽히기만 하는 이런 습관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한다. 이유는 '사고의 자유'를 기르라는 까닭이다.  어릴때부터 자꾸 치우고 정돈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길들여지는것은 수평적 단순사고만 키울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아이들은 아침에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고 이불을 둘둘 말아 아코디언처럼 오그라든다. 학교 가야 하니 빨리 일어나라고 난리 치는 아내와 매일 전쟁이 터진다.  조금의 변화도 없이 매일처럼 반복되는 그 난장판에 아내는 때론 화가 치밀어 아이들을 나무라고 질타를 하지만 나는 그런 아내더러 참으라고 말한다. 이게 나의 방목이다. 

아내는 무관심이라는 말로 나를 몰아 세우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정도 지나치면 병이 되고, 관심도 지나치면 참견이 되고, 오히려 반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아내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챙겨준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려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만큼 아이들은 스스로 설 수 있는 시간이 늦어지게 된다. 

세상에는 더 넓은 울타리가 있고, 그만큼 스스로가 헤쳐나가야 할 일과 책임질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을 방목하는 대신 때때로 책임을 쥐어주는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그래서 나는 이 생각을 가훈처럼 고수하고 있다. 
요즘도 아이들은 여전히 스스로 아침에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들 때문에 아내는 매일 속이 터진다. 

그러나 나는 자고있는 녀석들의 방으로 가 녀석들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속삭인다.
"야, 니들 학교 가기 싫지? 그럼 가지 마. 대신 학교 가서 뒷 일은 늬들이 책임 져! 그리고 나중에 거지 되면 아빠한테 밥 사달라고 하지마. "
아이들이 용수철처럼 일어나서 세수를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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