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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기차표 예매 해놔..아무데나
누구에게나 닥치는 위기, 실직과 사업실패 모두 다 잘 견뎌내시길
2012-10-31 03:34:09최종 업데이트 : 2012-10-31 03:34:09 작성자 : 시민기자   이영희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역경도 찾아 오고 위기에도 맞딱뜨리게 된다.
수일전에 2건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하나는 제약 도매업을 하던 친구가 부도가 났다며 당장 길거리로 나 앉게 생겨서 생활조차 궁하니 돈좀 꿔 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업이 잘 될 때는 외제차까지 타고 다닌적도 있기에 다른 친구들로부터 은근히 부러움을 사던 친구였는데 이젠 생활비 걱정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라 너무 안타깝게 되었다. 
당장 있는 돈을 털어 700만원을 빌려 주었다.

또 한 친구는 남편이 회사를 관두게 되어 우울하다는 전갈이었다. 요즘 중년층이 회사 다니다가 잘리든 스스로 나오든, 하루 아침에 실직자 되는거 너무 흔한 일이건만, 이 친구는 '내 남편만은 절대 그런 일 없이 60세 정년까지 갈거야'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로 인해 두달째 남편이 집에 있게 되어 매일 왼종일 집안에서 남편의 얼굴을 보는 일이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노라며 무척 우울해 했다. 올해 대학 들어간 아이와 지금 고2인 아이의 학비걱정까지...

정말 누구에게나 닥칠수 있는 험난한 고비. 주위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나도 한때 고비가 있었다. 친구와 똑같은 경우였다. 
남편의 실직. 그게 벌써 몇 년전인데, 그때는 나도 정말 난감했었다.

"여보, 기차표좀 예매 해놔"
"갑자기 기차표는 왜요? 어디로요?"
"응. 부산이나 강원도 쪽... 뭐 아무데나. 좀 멀리.."
아무데나? 멀리...?

남편의 실직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날 밤 12시가 넘어 만취가 다 돼서 퇴근한 남편의 표정을 살피다가 물었더니 회사를 그만뒀다고 실토했다.  남편은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모른채 쌔근쌔근 자고 있는 아이들의 볼을 어루만지다가 침대옆 방바닥에 거목처럼 쓰러졌다.  입에서는 이미 끊은지 10년이 넘은 담배를 피웠는지 담배냄새까지 났다.

3일후, 승용차를 놔두고 떠나는 기차여행, 남편이 실직한 덕분에(?) 떠나 보는 낯선곳으로의 여행에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왔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우리는 말을 아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서로가 표정에 신경을 썼다.  창밖 풍경은 너른 시골 들녘에 이른 아침의 안개를 머금고 넉넉한 아침을 그리고 있었다.  아침 햇살은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당분간 좀 쉬고싶어"
오랜 침묵을 깨고 그이가 한마디 툭 던진다.
"그래요. 그동안 열심히 일만 했잖아요. 이젠 좀 쉬며서 천천히 생각해 봐요. 그 회사에서 정년은 원래 바라지도 않았잖아요"

남편을 위로하면서도 현실과 생활에 대한 불안은 여전히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사오정이란 말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내 남편일줄이야. 나이 40대 중반에 실직이라니. 거기다가 적어도 남편의 직장이나 사회적 지위를 통해 느낄수 있는 프라이드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부로써의 일종의 상실감. 
타의에 의한 퇴직 앞에  마음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았던 터라 쉽게 정리는 안됐다.  아이들 교육도 여전히 남아있기에 더욱 그렇다.

여보, 기차표 예매 해놔..아무데나_1
여보, 기차표 예매 해놔..아무데나_1

"너네 남편 뭐하니?"
"우리 남편? 노는데...."
아, 곧 있을 여고 동창회에 나가서 누군가 내게 물었을때 해야 할 대답을 그려보니 나 모르게 머리가 도리질이 되었다.

부산에 도착한 우리는 바다 바람을 맞으며 태종대를 걸었다.  결혼전에 처음 만났던 곳이자 첫 데이트 장소가 태종대였기 때문이다.
팔짱 낀 우리 부부 앞으로 스산한 바람이 휙 지나갔다.  열혈 청년시절 처음 봤을때 남편의 모습과 지금은 많이 달랐다.
축 처진 그이의 어깨. 왜 이렇게 됐지? 나와 아이들을 위해 일하다가 그런거잖아? 우리 남편이 지금까지 이렇게 가정을 이끌어 왔잖아.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편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감싸 안아야 하는데 내가 왜이렇게 소갈머리 없는 바보처럼 이러지?  
나는 두 눈 질끈 감고 연극처럼 애교를 떨었다.  "여보 괜찮아, 뭘 그까짓거 가지고 그래요, 사람 죽으라는 법 없어요. 나도 나가서 벌수 있고, 우리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있어요. 다시 시작해요"라며 마치 마술에 걸린 사람마냥 수다를 떨며 위로했다.  

그리고는 "여보, 우리 소주 한잔 할래요? 내가 위로주 한잔 쏠께"팁으로 한마디 더 했다.
가볍게 끼었던 팔짱을 힘주어 당기면서 남편 얼굴을 쳐다봤다. 갑작스레 외친 나의 제안에 남편의 얼굴색이 생기있게 변한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듯.
"응. 그래. 안주는 내가 사지 뭐. 퇴직금 받을거거든"
그렇게 씩씩하게 나오는 남편의 맞장구에 힘이 났다. 

그날 우리 부부는 아주 오랜만에 멀리 떠난 여행지에서 아무런 부담없이 소주를 나눠 마시며 뒤를 돌아보는 여유도 가져 보았다. 
남편은 그후 넉달만에 취업이 되었고, 지금도 그 회사에 다니고 있다. 위기라고 생각하는 순간도, 때론 휴식과 기회가 될수 있으니 혹시나 지금 직장이든 사업이든 휴직중인 모든분들 마음 잘 추스르시고 실망하지 마시고 재기하시길 기원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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