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살리고 주민의견 존중하는 현장에서
전주 한옥마을과 통영 동피랑마을이 주는 의미
2012-10-15 20:02:56최종 업데이트 : 2012-10-15 20:02:56 작성자 : 시민기자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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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을 홍보하고 감시하는 수원시청 인터넷신문 e수원뉴스 시민기자단은 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워크숍을 가졌다. 전주 경기전 앞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e수원뉴스 시민기자단 경기전의 정조대왕 어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얼이 새겨진 한산도 제승당 전주 경기전은 조선왕조를 개국시킨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비롯해 7분의 임금 초상화 어진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어진 중에는 낯설지 않으면서 온화한 느낌을 주는 어진이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숙한 어진은 수원화성을 축성하고 계획도시 수원을 만든 정조대왕이었다. 일곱분의 임금 중에서도 정조 대왕이 위대하다는 느낌이 들어 발걸음이 멈추어 지는 것은 내고장 수원의 상징이 정조대왕과 수원화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은 전주 읍성 성안과 성밖 일부에 조성된 마을로 700여 채의 가옥이 전통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가옥은 개인 소유로 주민들이 생활하며 주거용과 영업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옥의 신, 증개축은 소유자가 자유로이 할 수는 있지만 마을의 미를 살리기 위해 한옥으로만 허용되며 한옥마을 건축법을 준수 하여야 한다. 주민 대부분은 관광객을 상대로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성곽은 일제강점기의 성곽훼손정책으로 사라지고 그 흔적조차 찾아볼 없었다. 주민의견이 존중된 동피랑 마을 동피랑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피난민과 생활이 어려운 서민들이 정착하여 판자촌을 이루며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이곳에 터를 잡은 사람들은 국유지의 대지에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협소한 공간을 차지하고 거주지를 마련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아직도 대지는 국유지로 불하받지 못하고 있으며, 건축물만 개인 소유로 등기된 가옥들이 상당수 있다고 한다. 50년대에 수산업이 발달한 부산과 통영 등 남해안에는 바다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수산물이 풍부하여 호황을 누리던 당시는 동피랑 마을 주민들도 생활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나 수산자원의 고갈로 마을은 낙후되고 재개발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재개발이 되면 동피랑 마을주민들은 보상을 받지 못하고 길거리로 나앉게 된다며 반대했다. 이유는 대지가 국유지로 등기 되어있고 건물에 대한 보상은 전무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통영시는 주민들의 의견 수렴 공청회를 거듭하고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현재의 마을을 보전하며 마을 만들기를 시작하였다. 허물어진 골목길을 수리하고 낡고 지저분한 담장에 벽화를 그려 마을전체가 미술관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처럼 주민의 의견을 존중한 시책이 각광을 받으면서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들고 텔레비전에 방송까지 되었다. 두 사람이 겨우 비껴갈 수 있는 낙후된 마을이지만 개발정책을 우선하지 않고, 주민의 의견을 존중하여 통영시 예산으로 마을 만들기 사업을 시작하여 성공을 거둔 동피랑 마을을 보면서 수원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 르네상스 시책도 그 효과를 거둘 날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는 뜻깊은 워크숍이었다.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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