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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모교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
2012-10-07 07:58:35최종 업데이트 : 2012-10-07 07:58:35 작성자 : 시민기자   홍명호

사라진 모교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_1
사라진 모교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_1

벌써 20년은 된 그해 가을 이맘때, 10월초에 고향에 갔을때 일이다. 
고향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내가 어릴적에 다녔던 국민학교 - 요즘의 초등학교 - 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 시골에 태어나는 아이들이 없어서 곧 분교로 전락을 해 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분교가 된지 몇해만에 아이들이 급격하게 줄어들자 결국에는 폐교가 될거라는 소문이 들렸다.
고향에 남아있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던 모교가 폐교 될거라는 소식은  그 학교 졸업생인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동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초등학교는 그래도 40여회의 졸업생을 배출했던, 당시로서는 근처 몇 개 부락의 학생들을 한데 모아 많은 인재를 키워냈던 시골 마을의 소중한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던 것이 학생수가 줄어들자 폐교가 논의되던 와중에 복식 수업을 해야 했다. 복식 수업이란 교사 1인이 2개 학년을 맡아 수업하는 걸 말한다. 당시에 파도처럼 일어났던 향도이촌 현상으로 인해 학생수가 줄어들고 있는 시골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사실 이 학교는 설립 당시 마을 어르신민들의 자부심 그 자체였다. 어르신들은 당신은 비옥 못 배웠지만 당신들의 아이들만큼은 제대로 가르쳐 보겠다는 희망과 일념으로 논밭을 선뜻 내놓았고 지게를 지고 비지땀을 흘리며 터를 닦아서 지으셨다고 한다. 
"내가 쪼금만 고생하믄 훗날 아들눔 허구 손주덜이 편하게 공부할거 아녀, 열심히 다듬고 일들 혀서 잘 만들어 봄세." 
그렇게 지어진 학교였다.

30여년간은 한때 이 학교는 학생수가 200명을 넘기도 했다. 그리고 지역 주민의 자랑답게 많은 학생들이 성장해서 나가 훌륭한 사람들로 컸다. 
나도 이 시골학교를 다닌 후 중학교부터는 읍내로 나와 큰 도시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소박하고 인정 많고 정직하고 순수했던 곳은 없었던듯 하다.

교실을 한번 청소하면 며칠이나 깨끗했다. 대도시 학교는 치우는 학생 따로 버리는 학생 따로였지만 이 곳 아이들은 학교 기물을 자기 것처럼 아꼈다. 창고 문을 온 종일 열어 놓아도, 과학실 문을 잠그지 않아도 조그만 물건 하나 없어지지 않았다. 굳이 아이들에게 도덕이나 공중질서를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
시골이다 보니 근처에 문구점이 없었다. 그것은 6일마다 한번씩 열리는 읍내 장날에 나가는 어르신 어느 한명에게 부탁해서 사와야 했다. 영수는 크레파스와 물감, 숙희는 공책 두권, 수현이는 도화지 한묶음과 지우개 2개... 이런식이었다.

아이들은 장날이 돌아오기 전에 그동안 쓰고 있던 학용품이 다 떨어지면 옆사람 것을 빌려 쓰고, 옆사람은 마치 가족처럼 그것을 빌려주고 같이 사용했다. 또한 한 아이가 욕심을 내 마구 가져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지내왔던 학교였건만 결국 폐교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다.

각 횟수별 졸업생들과 고향 어르신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한 한 뒤에 교육청에 찾아가 학교의 폐교를 막아 달라는 청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교육청에서도 참 난감한 입장이었다. 아니 달리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교육청이 그곳에 찾아간 우리들에게 보여준 법규를 보니 일정 숫자 이하의 학생들만 있는 학교는 더 이상 운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단 분교로 바꾼 뒤 그래도 학생 숫자가 늘어나지 않을 경우 폐교를 시켜야 한다는 지침이 그거였다. 

"몇 년만 지나면 학생수가 10명도 안될겁니다. 10명에 불과한 학교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학생들입니다. 사회성을 기르기 어렵고 학업 수행능력이 떨어지니까요."
교육청 담당 선생님의 설명이었다. 그게 틀린 말이 아니니 어찌하겠는가. 

그후 학교는 정말 많은 고향 어르신들이 보는 가운데 마지막 운동회를 열었다. 그것도  어느해 가을이었다.
그날 나도 현장에 모교 졸업생의 자격으로 함께 가서 운동회를 지켜보았는데 만국기가 펄럭이는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마지막 운동회가 열리는걸 보고 만감이 교차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 모두에게 운동복과 운동화를 선물했다. 어린이들도 폐교를 앞둔 마지막 운동회라는 말에 눈시울을 적셨고 "선상님, 참말로 감사합니다"하는 학부모들의 표정에서 아쉬움이 넘쳐났다. 

운동회가 끝나고 난 텅 빈 운동장을 보니 남자 아이 한명이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 녀석들은 훗날 이 학교를 어떻게 기억해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들었던 학교, 내가 어릴적에 꿈을 키우며 자라고 많은 동무들과 함께 숨쉬며 순박하게 자랄수 있도록 해준 학교는 그렇게 영영 사라졌다. 

이제 나의 모교는 없다. 이미 오래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텅 빈 운동장에서 혼자 걸어가던  아이의 뒷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도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을 바라보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는 이미 사라진 모교가 그리워 잠시 차를 세우고 한동안 먼 산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래곤 한다.

추억이란 흘러간 세월, 정지된 시간 속의 그리움이라고 한다. 그리움의 창을 넘어 그리움이 보고 싶어 달려가고픈 마음이고, 삶이 외로울 때 자꾸만 몰려오는거라는데... 내게 모교의 추억은 가슴 저리게 그리운 그 무엇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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