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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이발소의 추억
2012-10-07 10:27:27최종 업데이트 : 2012-10-07 10:27:27 작성자 : 시민기자   정진혁

요즘은 가뭄에 콩 나듯 눈씻고 찾아봐야 하는 이발소. 지금 40대 이상 중년은 돼야 이 이발소를 제대로 알고 이해할 것이다.
지금이야 고향 마을 안쪽에까지 버스가 쑥쑥 들어가지만 과거에는 고향에 갈 때면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에서 내려 약 3키로를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그때만 해도 버스길이 뚫리지 않아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눈이나 비라도 내릴라 치면 그 질척이는 비포장 흙길을 걸어가야만 했으니 이 또한 고행길이 아닐수 없었다. 지금이야 추억이기는 하지만.
중고등학교를 집에서 수십키로나 떨어진 시내로 나가서 손바닥만한 자취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하면서 '유학'을 해야만 했던 시절에 주말마다 반찬거리를 가질러 집에 갈때마다 의례껏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었다. 바로 이발소였다.

 

70년대 이발소의 추억_1
70년대 이발소의 추억_1

물론 3주, 혹은 4주에 한번씩 머리를 깎았지만 당시에 내가 그곳을 애용했던 이유는 학교를 다닌 시내 이발소보다 이곳이 훨씬 쌌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봄이면 마을 입구에 애송이 벚꽃이 만발해있어서 그 광경을 보면 저절로 흐뭇해지고, 가을이면 먼 산자락에 붉게 물든 단풍과 누렇게 익은 들녘이 나를 반기던 고향 마을로 가는 초입 마을의 풍경이었다. 

면사무소가 있던 면소재지 마을이었으니 이발소가 있었던 것이다.
이발소에 들어가면 문을 열자마마자 입구엔 '우리의 생활준칙'이란게 붙어있다. '윗어른께 효도하기, 간첩 보면 신고하기, 마을 깨끗이 청소하기.' 이 3문장이 씌여져 있는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여기서 간첩 보면 신고하기가 아마도 가장 중요시 했던 '덕목'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에 정말 북한에서 내려 보낸 간첩이 얼마나 많았는지 눈만 뜨면 어디에 간첩이 나타났다, 어디서 간첩 잡았다, 어느 마을에서 간첩을 신고해서 엄청 큰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간첩이 이마에 "나는 간첩이로소이다"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게 아니라 해도 어쨌거나 간첩신고는 당시에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다.

아마도 지금 생각하건데 이발소 주인 어르신의 신념을 그렇게 적어 놓은듯 했다. 그때는 어른 아이 할것 없이 남자들은 전부다 이발소에 가서 소위 말하는 바리깡(머리 깎는 기계를 일컬어 그렇게 불렀음)으로 머리를 깎던 시절이었다.

아무래도 어른들 보다는 학생들이 더 많이 찾아 갔으니 그 학생들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기 위해 그렇게 써 놓았던 것 같다.
또한 교과서나 대본소 만화 외에는 별다른 읽을거리 하나 없던 1960~70년대 보통 아이들이 폭넓은 인문교양을 접할 수 있는 장소도 엉뚱하게도 이발소였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상고머리, 빡빡머리 등 갖가지 형태의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깎으면서 극히 초보적인 형태나마 회화, 문학, 동양학 등에 대한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당시에 이발소의 인문학 교재는 이른바 '이발소 그림'이라고 불리운 원본을 모사해서 그린 복제화였다. 

프랑스 화가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은 어느 이발소에 가더라도 거의 예외없이 걸려 있었다. 우리 농촌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그림 속의 풍경을 보면서 이발소 손님들은 자연스레 서양 회화에 접근할 수 있었다. 
러시아 시인 푸슈킨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도 바로 이발소였다. 물레방아 돌아가는 그림의 한편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고, 그것은 감수성 예민한 아이들의 뇌리 속에 고스란히 각인됐다.

그때 이방소에서 처음으로 푸시킨(푸슈킨)이라는 사람을 알았고 그 싯귀를 처음 접했으니 이방소는 교양을 가르쳐준 공간이었던 셈이다.
어미 돼지가 새끼 돼지에게 젖을 물리는 그림에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한자가 적혀 있어 한자공부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나 같은 경우야 아버지를 잘 만나서 상급 학교를 다닐수 있었으나 농촌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당시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전부다 중교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짓거나 서울로 올라가 돈을 벌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시골에서 배울것이라고는 흙과 나무와 농작물을 보는게 전부였기에 이발소의 이런 그림과 문구는 교양학문에 버금 가는 것이었다.

이 조용한 시골에서 영업을 했던 허름한 이발소는 내가 버스에서 내려 항상 들르는 곳이었다. 건물로 치자면 60년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다. 우연히 이발소에 처음 들어섰을 때 머리 깎으러 온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꾸 들르다 보니 정이 들고 마치 나의 고향집 같다는 그 어떤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마치고 장성해서 군대에 갔다 오니 고향 마을에도 도로가 뚫려 버스가 다니게 되었고, 그 이발소가 있는 마을에는 들를 일은 사라졌다. 
그 이발소를 잊고 지내던 몇 년전에 우연히 승용차를 타고 그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발소 간판은 없어지고 정육점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 밖으로 나와 있는 사란늘 보니 정육점 주인은 당시에 까까머리 내 머리칼을 잘라주시던 그 아저씨였다. 이미 흰머리가 가득한 이발소 아저씨. 이젠 장사가 안되는 이발소를 접고 여전히 고향을 지키면서 정육점을 하면서 계셨던 것이다.
차를 타고 지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이발소 그림은 지금도 저 정육점에 그대로 걸려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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