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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은 내 부업이야
짜증이 아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전단지 한 장
2012-10-11 02:24:03최종 업데이트 : 2012-10-11 02:24:03 작성자 : 시민기자   이소영

한 달 전 엄마는 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와 연락이 닿아 만나고 오셨다. 
직접 뵌 적은 없으나 익히 들어서 딸인 나도 알고 있는 친구였다. 언젠가 한번 '성향'에 대해서 엄마와 열띤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그 아주머니가 등장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친구인데 엄마와 성향이 맞아서 참 편했던 친구라고 들었었다. 

만나러 가기 전날 엄마는 내게 이런 말을 하셨다. 
"그 친구와 연락이 다시 닿아 들뜨고 좋은데, 걔가 보험을 한다네? 보험 가입 시키려고 친구들 통해서 내 연락처 알아낸 것일까? 나도 참 그런 선입견이 생기네." 
엄마는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먼저 드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다음날 저녁 퇴근 후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가서 제일 먼저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그 친구 잘 만나고 왔어?" 엄마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자신과 맞는 성향이라고 배시시 웃으셨다. 그렇게 나는 엄마 친구 이야기를 한 시간 넘게 들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곧장 결혼을 했던 친구는 신혼생활을 부족함 없이 넉넉하게 시작했다고 한다. 아파트도 있었고 수원 팔달문에서 안경점도 크게 해서 여유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다가도 모를 일이 사람일이라고 하던가. 남편이 안경점을 담보로 빚보증을 잘못 서주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빨간 딱지가 붙고 말 그대로 돈 한 푼 없이 쫓겨나 쫄딱 망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식당 일부터 파출부 안 해본 일이 없으셨단다.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옛날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많이 늙어서 사실 엄마는 처음에 못 알아봤다고 하셨다. 
힘겹게 살아왔던 친구의 지난 이야기를 들으며 안쓰러워질 만도 한데 친구는 너무나도 씩씩했다고 한다. 
"그래서 너 요즘은 보험 하니?" 라는 질문에 그 아주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단다. 
"솔직히 말해서 실적 올리고 남한테 부탁하는 것이 내 스타일도 아니고 그건 부업이나 마찬가지야. 5년 전부터 내 직업은 전단지 아르바이트생이야." 
"웬 전단지 아르바이트?"
"응 바로 바로 당일 현금으로 지급되지 운동도 되지 시간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지. 나한테 딱 이야." 

자세히 그 내막을 들어보니 워낙 손재주 좋기로 유명했던 아주머니는 수채화 유화 수묵화 같은 취미 생활을 즐기시고 싶으셨던 나머지 문화센터 수강 시간 전후로 시간조정하기 쉬운 전단지 아르바이트 일을 시작하게 되신 거란다. 
그동안 개인전은 아니어도 몇몇 사람들과 함께 전시회도 몇 차례 열었단다. 자신도 사람인지라 그런 곳에 오는 여자들을 보면 대부분 사모님 소리를 듣거나 교수 부인도 많아 기가 죽을 때도 있지만 비교하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 자체에 감사하며 사신단다. 

엄마는 속사포로 친구 이야기를 내게 쏟아내며 친구를 만나러 가기 전 생각했던 그 마음이 부끄럽고 미안하며 한편으로는 그 친구가 부럽고 멋져보였다고 하셨다. 
나이 오십에도 취미 생활을 그토록 열심히 하는 열정과 물감 재료가 너무 올라서 전단지 좀 더 붙이고 살아야 해 라고 말하는 자신감이. 나도 엄마의 생각에 공감이 갔다. 

난 엄마 친구 이야기를 들은 후 부터 전단지를 붙이거나 일수 명함 등을 돌리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생각 외로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그래서 예전에는 또 하나의 쓰레기 더미로 취급하며 퉁명스럽게 바라보았다면 요즘은 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그들을 대한다. 

가장 큰 변화의 예는 이제는 강남역에 즐비해 있는 전단지 아르바이트생들의 종이를 거절하지 않고 그냥 받는다는 것이다. 한 장 받는다고 커다란 선행인양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혹시라도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자식이 혹은 병든 노모가 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니까 그들도 종이가 그들의 손에서 없어져야 집으로 돌아 갈 테니까 라고 생각의 전환을 한 것이다. 예전에는 피곤하고 짜증나기만 했다. 내 앞으로 전단지를 들이 밀 때는. 

사실 나도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두 번 해본 적이 있다. 한 번은 중학교 때 용돈 벌이로 친구들과 함께 치킨 집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반 이상은 몰래 버리고 왔고, 또 한 번은 대학교 때 다이어트를 하겠다며 무더운 여름 날 선크림 듬뿍 바르고 모자 하나 달랑 쓰고 몇 일 했었다. 
허나 기억은 뭐 좋지는 않다. 아파트 단지 경비 아저씨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난리가 나서 간이 콩알만 해졌었으니까.

그때 아마 난 깨달은 것 같다. 돈 1000원 벌기가 쉽지 않구나. 어릴 적 엄마가 "땅을 파봐라. 돈 10원 이라도 나오나." 라는 말이 정말 이구나. 물론 내 동생은 그때마다 철봉 아래에서 500원도 줍고 1000원도 주웠는데 라며 깐죽거렸지만.

보험은 내 부업이야_1
폐품 할머니의 뒷 모습

좌우지간 계속되는 불황 속에 저성장 고실업이 구조화 된지 오래다. 호의호식은 둘째 치고 밥 값 조차 연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정부에서 내놓는 정책들은 이제는 희망이 아닌 포퓰리즘성 거짓말로 느껴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마나 불안과 걱정을 안고 산다 하지만 이럴 때일 수록 조금 더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어떤가 싶다. 작은 전단지 한 장을 받는 손길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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