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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였던 시인 이육사의 외동혈육 만난 날
이육사 시인 단 하나뿐인 딸, 이옥비 여사의 증언
2013-10-07 13:50:30최종 업데이트 : 2013-10-07 13:50:30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어머님은 저를 눕히곤 머리맡에서 사시사철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당시엔 어린나이였으니 듣기 싫었던 적이 참 많았지요. 아버지(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3대 손이었던 진성 이씨 이가호와 어머니(허길)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난 분으로 어릴 때 이름은 원록이었으며 두 번째 이름은 원삼이었고.....그런데 어느 순간 철이 들고 부터 어머님의 이야기가 그지없이 고맙게 들리더라고요. 지금은 아버지가 한없이 자랑스럽습니다."

혁명가였던 시인 이육사의 외동혈육 만난 날_1
시 청포도

1941년 2월에 태어난 이옥비(李沃非) 여사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어제일인 양 술술 풀어나갔다. 
물론 이시기부터 1944년 1월 북경에서 순국하기까지 항일독립운동으로 인한 모진 옥고를 치르고 허약해진 몸을 추스르면서도 북경을 오가던 시기라 하나뿐인 혈육 이옥비 여사와의 다정했던 추억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을 어머니와 외삼촌들로부터 수도 없이 전해들은 터라 그의 정신세계에 오롯이 박혀있었던 것이다.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당시 원촌동881번지)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독립투사 혹은 저항시인으로 기억되는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가 태어난 곳이다. 
그는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갔다. 대한민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하기 일 년 전에 태어나고 그토록 갈구하던 광복의 순간을 보지 못하고 40세가 되던 해에 삶을 마감했다. 참혹한 식민지시대였지만 시와 함께 혁명의 길을 걸으면서 미래의 해방된 세계를 꿈꾸던 참 지식인은 시대를 밝히는 시어들을 남긴 채 세상과 이별했다. 

"78세까지 저와 함께 사시던 어머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성품이 깔끔하여 집에 들어오시면 상의를 벗어 먼지를 털고, 하의는 아랫목에 펼쳐 깔고 주무셨다. 동네 어르신들의 말씀에 따르면 지혜롭고 명찰하셨다. 이른 새벽에 심신을 단련한 후 늘 새벽공기를 마시며 글을 쓰던 분'이셨다고 합니다. 또한 6형제가 우애가 깊어 주변에 소문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이옥비 여사는 아버지(이육사)가 돌아가신 후 외삼촌들이 대성통곡했던 일이며 당시 외갓집으로 숨어들었던 일, 아버지 형제와 외삼촌들도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던 일화, 나라 잃은 슬픔이 가장 큰 일이니 내가 죽어도 울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외할머니 말씀 등을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위로 오빠와 언니가 있었지만 2살과 100일을 채우지 못하고 사망한 후 유일한 혈육으로 남아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철이 들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고, 70세가 넘어서자 절절히 와 닿는다고 했다. 

"외삼촌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뵈었지요. 북경으로 압송되기 전 용수를 쓰고 포승줄에 묶여 '아버지 갔다 오마'라고 말씀하셨다는데 당시 너무 어리다보니 곧 잊어버렸습니다. 제 기억을 다시 일깨운 것이 대구교도소였어요. 그곳에서 용수를 쓰고 포승줄에 묶인 죄수를 본 순간 우리아버지 모습이 떠오르는 거예요."

혁명가였던 시인 이육사의 외동혈육 만난 날_2
문학관 내부

'내가 들개에게 길을 비켜줄 수 있는 겸양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내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계절의 오행(季節의 五行)'중 일부분이다. 선비정신의 기개가 펄펄 살아 숨 쉬는 글에서 느껴지듯 식민체제와 급변하는 시대는 이육사 시인의 기백을 흔들어 놓고도 남았을 터이다. 

외가와 본가의 피가 온전히 전달된 것일까. 1964년 혼인 후 대구와 서울서 사시던 이옥비 여사는 2007년부터 아버지의 정신이 흐르는 안동에서 살고 있다. 2004년 이육사 탄생 100주년, 순국 60주기에 맞춰 이육사문학관이 개관한 후 3년 후다. 
이옥비 여사는 비록 연세는 70이 넘어섰지만 말씀내내 두 눈동자는 형형했고 목소리는 강건했다. 17번이나 옥고를 치르면서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을지라도 부당한 시대와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기상을 이어받았음이리라.

혁명가였던 시인 이육사의 외동혈육 만난 날_3
이옥비 여사님과 함께

동시대 시인으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윤동주시인은 연길 용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원적은 함경북도 회령이고 북간도로 이주했을 뿐 이민을 간 것도 아닌데 현재 중국은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라는 푯말을 세우고 우리역사를 왜곡한 채 새 단장을 하여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2013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오늘의 현실을 보며 지하에서 흐느낄 윤동주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본적은 있는가. 또한 이육사 시인의 치열한 시대의 소산물인 시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적은 있는 것일까. 부끄럽고 부끄러운 오늘이다.

혁명가였던 시인 이육사의 외동혈육 만난 날_4
경기시인협회 회원들

* 이육사 문학관 탐방은 한국경기시인협회(이사장. 임병호) 가을 역사문학기행 일환으로 다녀왔다. 참신한 기획과 친절한 안내로 늘 행복한 답사다. 이 자리를 빌려 안동기행에 기꺼이 안내해 주신 시인이자 안동시청에 근무하시는 김윤한 선생님께 감사인사를 전한다.

 

 

이육사문학관, 한국경기시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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