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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 매당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걷다
지리산 자락에서 아름다운 사람과 자연을 만나다
2013-10-07 14:42:11최종 업데이트 : 2013-10-07 14:42:11 작성자 : 시민기자   홍승화

해뜨기 전 출발한 탓에 잠깐 눈을 붙였다 뗐는데, 차는 벌써 망향 휴게소에 도착해 있다. 구겨진 몸을 펴볼 참으로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펴다 하늘을 본다. 파란 하늘 반, 하얀 구름 반이다. 파란 종이에 대형 붓으로 몇 번 휙휙 선을 그어놓은 것이 예술혼이 담긴 대가의 작품 같다. 하늘에 객식구처럼 떠돌던 구름이 오늘만큼은 방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 매당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걷다_1
지리산 둘레길, 매당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걷다_1

오늘은 지리산 둘레길 3코스로 나들이를 왔다. 매동마을에서 출발해 금계마을 까지 걷는데, 초행길이라 설렘과 기대감으로 발걸음이 가볍다. 마을 입구에서 백여 미터 떨어져 내리니,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빨갛게 익은 사과들이 먹음직스럽게 달려 있다. 
마을에는 예쁜 간판을 단 민박집들이 눈에 띈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빨간색 화살표를 따라 걸어야 한다. 눈 가는 곳이 많아 작은 나무판에 새겨진 화살표를 자꾸 놓친다. 언덕을 오르니 미루나무 꼭대기에 휴게소에서 봤던 구름들이 걸려있다. '미루나루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있네~'

대나무밭을 끼고 포장도로를 걷는다. 나이테가 촘촘하게 채워진 고목들로 덮인 오솔길도 걷는다. 상쾌하다. 나무 계단을 만나고, 알맹이 빼앗긴 밤송이를 밟는다. 한 뭉치씩 모여 한들거리는 코스모스는 한가롭다. 

2km쯤 걸었을까 눈에 띄는 안내판이 있다. '지리산 갤러리 길섶' 빨간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쪽이 아니다. 잠깐 고민하다, 가기로 한다. 숲속 어둑한 길을 구절초가 하얗게 불 밝혀주고 있다. 구절초 구경에 지루할 쯤 '길섶'너와지붕이 나를 반긴다. 보고 온 구절초보다 더 많은 구절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 매당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걷다_2
지리산 둘레길, 매당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걷다_2

'길섶'을 '김광석'의 노래로 먼저 만난다. 지리산 자락에서 듣는 그의 목소리는 맑은 대낮인데도 애절하다. 마당에 들어서니 큰 천막에 마실 온 동네 아낙들이 수다를 떨고 있다. 대장장이 같은 인상의 아저씨가 보자마자 대뜸 인절미를 권한다. 떡은 괜찮다고 갤러리로 들어간다. 
이 십 여점의 사진에 지리산의 사계절이 다 들어있다. 아침에 본 구름 탓인지, 지리산 중턱에 구름이 걸쳐있는 사진에 한참을 머문다. 사진 삼매경에서 빠져 나올 때에야 농부 아저씨가 사진작가임을 감지한다.

맛보라던 말이 빈말은 아니었나보다. 구절초 한 송이로 멋 낸 접시 위에는 수북하게 인절미가 담겨있다. 산에서 만난 구절초는 천연덕스러운 시골 처녀 같더니, 지금은 대갓집 종부처럼 귀품 있게 앉아 있다. 
인절미 하나를 집어 먹어본다. 고소한 콩가루가 코끝에 머물고, 쫄깃하게 씹히는 그 안에 쌀알이 숨어있다. 갓 찧어 만든 가제(家製) 인절미다. 그제야 천막 안 절구에 눈이 가고, 인절미 접시에 더욱 손길이 간다. 몇 개를 더 집어먹는 사이 접시가 비어버린다. 떡보 남편 때문이다. 

목이 말라 커피를 주문한다. 사진작가 겸 사장님이 원두를 직접 갈아 아메리카노를 만든다. 뜸을 오래 들이니 커피 맛은 좋겠다. 커피 값을 물으니 따로 받지 않고, 갤러리 안 후원함에 자유롭게 넣으면 된다고 한다. 참 어려운 커피 값이다. 커피 값은 장소에 따라 1천원에서 만원단위까지 천차만별인데, 얼마를 내야하나? 

"오늘 날씨가 유독 좋지요?"라고 물으니 "지리산은 사계절 날씨가 정확합니다."라는 화답이 온다. 
봄은 봄답고, 여름은 여름답고, 가을은 가을답고, 겨울은 겨울답다는 것이다. 지리산 자락의 겨울다운 겨울은 어떤 것일까? 내가 싫어하는 계절 겨울이 유독 궁금하다. 도시에 사는 나는 어느 때부터인지 이(二) 계절을 보내고 있다. 여름과 겨울.

"도시 사람들은 시골에 와서 인심을 얻으려고만 합니다. 베풀려고 하지는 않고. 둘레길 오면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는 것을 보는데, 밥 사먹는 것도 인심 베푸는 것입니다."
허를 찌르는 말에 배낭 안 가득한 간식이 민망스럽다. 
"여행사에서 단체로 오면, 시간이 부족할까봐 도시락을 싸오게 돼요."라고 궁색한 대답을 하니 "그럼 도시락을 현지에서 주문하면 좋지 않을까요?"라며 반격을 해온다. 할 말이 없어진다. 그 지방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니 지당한 말이다. 

등산을 다닐 때 유독 많은 간식을 싼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7~8년 전인가 물 한 병을 가지고 소백산을 오른 적이 있다. 2시간 정도 걸으니 갈증과 배고픔으로 눈이 뒤집히는데, 약수터도 매점도 없다. 난감했던 차에 그늘에서 오렌지를 먹고 있던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손짓으로 나를 부르더니 오렌지 한 개를 통째로 주는 것이다. 
등산하다 지치면 눈꺼풀도 무겁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오렌지 하나는 얼마나 무거운가? 그러나 그 아주머니에게 생명수를 얻은 느낌을 받은 그 이후부터 무겁더라도 간식을 넉넉히 챙겨가는 버릇이 생겼다. 나도 누군가에게 생명수를 나눠주기 위해.

찐 고구마 3개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인절미 값으론 턱없이 부족하지만 내 방식의 보답이다. 늦가을, '길섶'마당에 모닥불 피워놓고, 군고구마 익어가는 냄새 맡으며, 밤하늘의 별을 세는 그 날을 기약해본다. 김광석 노래를 함께 흥얼거릴 친구와 함께 한다면 더욱 좋겠지.

지리산 둘레길, 매당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걷다_3
지리산 둘레길, 매당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걷다_3

환송받으며 '길섶'을 나오니 갈 길이 멀다. 오르막은 숨차지 않을 만큼 오르고, 내리막은 다리 후들거리지 않을 만큼의 경사도라 걷는 길이 수월하다. 다랭이 논의 굽은 선이 한복의 치맛자락처럼 멋스럽다. 미처 베지 못한 벼가 탐스러워 손을 뻗어 훑어보고 싶다. 융단처럼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지리라. 매달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휘청거리는 대봉 감나무도 복스럽다. 

노상에서 대추, 으름열매를 펼쳐놓고 파는 아줌마를 만나 난생 처음 으름열매 맛을 본다. 주먹 반 크기만 한 으름열매가 익으면, 입을 쩍 벌려 감추고 있던 누에고치 같은 타래를 내민다. 물컹한 솜뭉치 속에 숨겨진 까만 씨앗을 씹는 재미가 쏠쏠해 열심히 씹다보니 입안이 쌉쓰름하다. 씨앗 때문이란다. 처음 느끼는 신기한 맛에 하나를 다 먹어버린다. 맛은 없다.

지리산 둘레길, 매당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걷다_4
지리산 둘레길, 매당마을에서 금계마을까지 걷다_4

저만치 고구마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가 보인다. 캔 고구마를 길가로 옮기려 하는데 버거워 보인다. 마침 옆에 지나가던 여행자가 선뜻 들어 옮겨준다. 할머니는 고구마 몇 개를 집어주지만 여행자는 사양하며 간다. 할머니는 고집스럽게 소리 지른다. 결국 할머니의 성화에 저만치 가던 여행자가 발길을 멈춘다. 결국 그의 손에 고구마가 들려진다. 도시 인심에 농촌 인심의 보답인가? 정겹다.

금계마을 폐교에 4시 50분까지 도착하는 것이 여행사 지령인데 도착하니 4시 35분이다. 중간 중간 주막이 눈에 띄었지만 눈 딱 감고 허겁지겁 왔다. 금계에서 편한 마음으로 막걸리 한 잔에 파전 먹을 기대감으로. 그런데 결국 시간이 없다. '길섶'에서의 인절미와 커피, 그리고 후한 인심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벼 베고 난 논자리부터 하늘 위 구름까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 10월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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