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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고무신의 추억, 기억 나세요?
2012-09-28 16:32:12최종 업데이트 : 2012-09-28 16:32:12 작성자 : 시민기자   정진혁
퇴근길에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목욕탕에서 신을 욕실화와 운동화좀 사 가지고 오라길래 시장에 간 김에 신발가게에 들렀다.
용도도 다양하게, 모양도 각양각색, 그리고 종류도 수많은 신발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요즘 아이들 운동화 한 켤레도 10만원 단위가 넘고, 어떤거는 20-30만원도 기본으로 한다고 들었다. 오죽하면 자동차 타이어 파는 가게에서 '타이어, 신발보다 쌉니다'라는 홍보 플래카드를 붙여 놓았을 정도일까.
하지만 나는 그런 신발 사고싶지 않다. 그럴 돈도 없고, 그런 신발을 굳이 신을 필요성도 못느낀다. 요즘 재래시장에서 파는 신발도 싸고 질 좋은게 많기 때문이다.

검정 고무신의 추억, 기억 나세요?_1
검정 고무신의 추억, 기억 나세요?_1

신발을 고르다 보니 욕심이 생겨 내 것도 하나 구입했다. 한여름에는 집 밖에 나갈 때 그저 편하게 샌달을 신고 다녔지만 이젠 날씨가 쌀쌀해지게 되니 나도 집밖에 수퍼 갈 때 신을 적당한 신발이 필요할듯 해서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뒤져봐도 고무신은 안보인다. 그냥 집 밖에 나갈 때 신기로는 고무신이 제격일거라는 황당한(?) 생각이 들어서이다.

또한 그냥 고무신이 궁금했다.  오래전 어릴적에 신던 그 추억의 고무신, 요즘도 그런게 나오는건지... 신발가게 사장님더러 고무신은 없냐고 물으니 그걸 뭐에 쓰려고 하냐며 핀잔처럼 웃으며 되묻는다. 겉은 번지르르하게 양복까지 차려 입은 사람이 고무신을 찾으니 이해가 안됐던 모양이다.
"그냥요. 요즘은 안만드나 봐요"
"왜요? 만들어요. 나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만드는지 안만드는지 몰라요. 그런데 중국산은 들어와요. 우리집은 없는데 저기 모퉁이 지나서 저쪽에 가면 신발가게가 하나 더 있어요. 거기는 고무신 팝니다. 어떤 사람은 보라색도 신던데"

하, 참... 고무신을 아직도 판단다. 그것도 보라색을 신는 사람이 있다고? 풀썩 웃음이 나왔다. 내가 어릴때는 검정고무신이 대세였는데. 
운동화와 욕실화를 사 들고 나오면서 옛날 생각을 해 봤다.
어렸을적에는 가죽으로 만든 운동화는 아예 없었고, 천으로 만든 운동화가 그렇게 신고 싶었지만 가난한 농촌에서 언감생심이었다. 그나마 검정고무신도 감지덕지였다. 질기고 오래 신던 고녀석이 낡고 닳아 구멍이 나고 너덜너덜 해질 무렵 아버지가 불쑥 "장날 신발 사러 가자"며 기대를 부풀려 주셨다.

그때 시골 재래시장에 한번 나가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동이 터 올 무렵 아버지는 마당 정리를 하시고 어머니는 한달 내내 모아뒀던 씨암탉이 낳은 계란을 짚 꾸러미에 싸신다. 장에 내다 팔 요량이셨다. 

당시 시골의 재래시장은 유독 컸었고 팥죽, 잔치국수, 오리지날 옛날순대, 놋그릇에 비빔밥, 국밥등 거리가 풍성했다. 난 새알심이 듬뿍 들어간 팥죽이 그렇게 좋았었다. 어머니와 좌판에 앉아 사카린(후에는 당원)을 넣고 먹었던 그 새알 팥죽.  그래서인지 지금도 팥죽을 계절에 상관없이 즐겨 찾는다.

구멍이 뻥 뚫려 엄지 발가락이 히죽 얼굴을 내밀던 검정 고무신을 사기 위해 신발상회에 갔다. 디자인이래야 별것 없었다. 검정고무신이 다 그랬으니까. 발에 맞는 것을 고르니 어머니가 "한문 더 큰거 주셔유"라고 하신다. 지금이야 cm로 크기를 말하지만 그때는 크기를 5문, 6문 그렇게 불렀다. 아이들 신발 한 켤레가 몇십만원씩 하는 요즘에는 줘도 안신을 그거였지만 그때 검정고무신 한켤레 얻어 신은 나는 천지가 내것처럼 기뻤다. 

흙을 묻히기 전에 방과 마루를 수없이 맴돌며 입이 함지박만해 가지고 그저 마냥 부모님이 고맙고 감사하며 밤잠 못 이루고 그 이튿날 친구들에게 자랑할 일이 머리를 뒤 흔든다. 여름날 땀이라도 났을때 달리기를 하면 신발이 큰데다가 발 따로 신발 따로였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땀이 차면 질컥거리고, 뛰어가다 보면 훌떡 벗겨지는 검정고무신.  때가 묻어도 표가 안 나고 오물이 묻으면 빨래 비누를 묻힌 수세미나 짚으로 닦아내고 나서 물로 헹구면 그만이었다. 
물이 새지 않는 고무신은 좋은 장난감이기도 했다. 냇가에 나가 고기를 잡거나, 흙장난할 때 흙이나 모래를 퍼담아 부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멱을 감을 때는 바가지 대신 물을 퍼서 끼얹는데 쓸 수도 있었다.  반을 접어서 배를 만들기도 하고, 냇가에서 잡은 물고기를 고무신 안에다 물과 함께 담아 들고 집에까지 맨발로 걸어서 간 적도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검정 고무신은 두꺼비집을 짓거나 모래성을 쌓을때 훌륭한 장난감 도구가 되기도 했고, 소나기 내린 날이면 동네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흐르는 물 막아놓고 나룻배나 돛단배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급류에 밀려 고무신 한짝 떠내려 보내기라도 하면 그날은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밖에 쭈그리고 앉아 저녁밥을 홀딱 굶고 자야만 했다. 

흰색 고무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고무신이 검정색이었던 것은 폐타이어나 튜브 등을 주원료로 한 재생고무를 사용해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고무신에 구멍이 나거나 해지면 고무조각으로 때워서 계속 신고 다녔다. 더 이상 때워서 신을 수 없을 정도로 고무신이 낡으면, 고무신을 고물장수에게 가져가 엿이나 강냉이 튀긴 것과 바꿔 먹곤 했다.

지난 날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 아니면 신기에 편리하고 가볍기 때문일까? 요즘도 집 안에서 마당을 거닐 때 신는 신발로 검정고무신을 애용하는 나이 드신 분들을 가끔씩 볼 수 있다.  지금도 그때 검정고무신 브랜드 상표가 기억난다.  왕자표, 말표... 

가난이 유죄라 보리밥으로 도시락을 싸고 책보따리를 허리에 묶고 다니던 시절, 우리의 최고 아이콘은 뭐니뭐니 해도 검정고무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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