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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 벌초를 하면서 느낀 묘지 문제
2012-09-20 08:40:37최종 업데이트 : 2012-09-20 08:40:37 작성자 : 시민기자   홍명호

'위이이이잉~'
벌초를 위해 형제들과 멀리 사시는 당숙네, 사촌 형제들 모두 모여 풀을 깎는다. 두 대의 예초기가 경쾌한 기계음을 내며 돌아간다. 과거에 낫으로 깎던 것과 달리 이제는 벌초도 이렇게 기계로 하니 그나마 좀 편해졌다. 

돈 있는 사람들, 혹은 바쁜 사람들은 벌초 대행업자에게 돈을 주고 벌초를 맡긴다 하지만 우리 형제들은 아무리 바빠도 조상님의 묘는 우리 손으로 직접 손질해 드린다.
시민기자가 사는 수원을 비롯해, 서울, 대전, 성남, 경북까지 우리 집안이 모두 고향 선산에 모였던 지난주 토요일과 일요일. 
조상님의 묘가 있는 선산에서는 이른 새벽부터 벌초기가 돌아가는 굉음이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날은 우리 가족 말고도 전국이 벌초의 열풍이었다고 한다. 이런 날 고속도로에서 잘못 걸리면 명절때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차량 정체가 심각하기 때문에 우리 집안 가족 형제들은 토요일 밤에 내려가 일요일 새벽 6시부터 조상님들 묘소에 가서 잔디와 풀을 깎기 시작해 오전 10시에 마쳤다. 

조상님 벌초를 하면서 느낀 묘지 문제_1
조상님 벌초를 하면서 느낀 묘지 문제_1

우리 가족의 묘는 과거에 선산과 고향마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지만 최근에는 간단히 납골묘를 만들어 모두 한곳에 모셔드렸다. 조상님들도 한곳에서 오순도순 모여서 영면하시라고.
그리고 그렇게 묘소를 정리해 보니 산야를 뒤덮고 있던 묘지들이 줄어들어서 자연환경 보호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실 벌초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도로변 산에서 벌초행사를 하는 수많은 가족들을 볼수 있었는데, 그동안 생각 못하던 묘지문제를 다시금 떠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묘지가 참 많다는 생각이었다. 어느 돈 많은 집안의 묘는 봉분 하나만 있는 묏자리인데도 그 크기가 좀 과장되게 표현을 하자면 거의 운동장 크기로 파헤쳐 만든 곳도 있었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각 묘지마다 몇십평 이성 주위의 나무와 수풀을 깎아 헤치고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 묘지들이 눈에 보이는 길가에만 곳곳에... 참 많은 묘지가 우리 산을 덮고 있어서 안타까왔다.

중국인들은 모택동의 치적 중에 소위 '3불5대체(三不五代替)'라는걸 꼽는다고 한다.  15억이 넘는 엄청난 인구가 집집마다 조상 묘터를 만들다 보면 제 아무리 넓은 중국대륙이라도 언젠가는 묘지사태로 국토가 곰보자국이 될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 모택동은 '모든 사람의 신체는 사후에 화장하여 뼛가루만 남기고 묘를 만들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때 나온 장묘문화 개혁 구호가 '3불5대체'다. 
'3불'은 사람이 죽은 뒤 단(壇)을 만들어 놓고 망령을 천도하지 말고, 종이 인형 등의 미신용품을 사용치 말 것이며, 삼베로 된 상복(喪服)을 걸치지 말라는 금지사항이었다. 
5대체는 상여행사를 추도회로 대체하고, 화환을 바치는 것으로 제(祭)를 대신하며, 검은 리본을 가슴이나 어깨에 다는 것으로 상복을 입는 걸 대신하고,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는 것을 목례로 대신하며, 과학적 사고로 봉건미신을 대체한다는 5가지 내용이다. 

온 가족이 모여 벌초를 하고 돌아오던 지난 주말에는 유난히 그 모택동의 '3불5대체'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심산 꼭대기 쪽에 묘터를 잡았던 가세 큰 집안의 후손들일수록 도시 근교 공원묘지에 조상을 모신 후손보다 본의 아니게 더 불효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들 해서다. 벌초를 가고 싶어도 밀림처럼 우거진 짙은 숲에 외진 길을 찾아 올라갈 엄두를 못 내다 보니 고얀 후손이 돼버린다는 것이다. 

죽어서 성묘 송편 하나라도 제대로 얻어먹으려면 심산유곡 명당보다는 납골당이나 수목장이니 잔디묘소 같은 데 묻히는 게 나은 세상이 돼가는 세상이니 이제는 정말 우리 모두 묘는 그런식으로 만들어야 하는것 아닌가 생각해 본다.
스위스 같은 국토가 좁은 나라는 부모 형제의 묘라도 매장 후 25년이 지나면 유골을 다시 파내 비료로 활용한다는 다소 충격적인 문화를 갖고 있다. 

좁은 오스트리아도 무려 130여년전에 흩어져 있는 묘지를 한곳에 모으는 노력을 했는데 4대가 한 자리에서 4층 구조의 다단계 묘지에 함께 묻히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다단계 묘지의 가로 세로 크기가 겨우 1.4m 넓이밖에 허가되지 않는다니 정말 이런것은 우리가 배울점이 아닐까 싶다. 
이제 앞으로 우리는 우리가 죽거들랑 우리 후손들이 국토를 아끼기 위해 오스트리아 같은 방식을 택할지 모른다. 지금 당장 우리가 못한다면 우리 후손들이라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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