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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연탄불
2012-09-24 20:22:07최종 업데이트 : 2012-09-24 20:22:07 작성자 : 시민기자   이연자
귀뚜라미 시끄럽게 울면 나는 생각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 겨울이 다가 온다는 것을 알려주고 지네들은 할일 다했다고 몸도 감추고, 소리도 감춰 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겨울 준비를 해야한다. 
겨울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연탄이다. 예전에는 연탄이 어느 가정에서나 많이 사용했기에 친근감이 있고 귀한 것이었다. 

지금은 연료가 좋고 난방이 잘되어 있어 겨울에도 춥게 지내지 않지만 옛날에는 도시에서도 연탄을 연료로 사용 하던 때가 얼마되지 않은것 같은데, 요즈음은 일부 소수 가정에서만 연탄을 때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때쯤 이면 겨울에 쓸 연탄을 준비하고, 겨울에 먹을 쌀과 곡식을 준비 하며, 김장도 많이 담궈 땅속에 묻어놔야 겨울을 편하게 날 수 있다.

연탄하면 생각이 나는 사건이 있다. 중학교때 였던 것 같다. 우리집은 산골이라 연탄을 때지 않았고, 나무를 땔감 으로 썼기에 연탄은 접해보지도 못했던 때였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교가 너무 멀어 고모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추억의 연탄불_1
추억의 연탄불_1

고모집은 면소재지에 있어 우리 집에 비해 도시였다. 약방을 하시던 고모는 가끔 약방을 비우고 마을도 가시고 볼일을 보시러 집을 비우시곤 했다. 그럴때면 내가 소화제도 팔고 두통약도 팔았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종종 그런일이 있었다. 고모는 자녀가 없었기에 고모와 둘만 살았다. 그러니 고모가 집을 비우시면 혼자가 되는 것이다. 그날도 고모가 나가시면서 '저녘때 연탄좀 갈아라' 하시며 집을 비우셨다. 

촌놈이 연탄을 갈아 봤어야지 가끔 고모가 하시는 것을 봤을 뿐 제대로 가르쳐 주신적도 없다. 계속 신경이 쓰여 열어 보고 또 열어보고 를 몇번을 하다보니 연탄 가스 냄새를 맡아 머리도 아프고 어지럽기도 했다.
'저녁때라고 하셨으니 지금 갈면 되겠지' 떨리기도 하고, 너무 무서웠다. 집게로 들어보니 두개가 붙어 있었다.' 뜨겁기는 왜이렇게 뜨거운거야' 무거워서 낑낑대며 들고 뒷마당으로 가서 눈위에 뉘어놓고 연탄 집게로 사정없이 두드려 겨우 분리를 시켰다. 

불이 붙은 연탄을 밑에 넣고 새연탄을 한장 가져다 구멍을 맟추어 놓고 뚜겅을 덮어 놓았다 .추운 겨울인데 내 등줄기에는 땀이 줄줄 흐른다. 겨우 끝냈나 싶은데, 떼어진 연탄에는 아직도 불이 있어 약간 빨간 상태다. 고모 오시기 전에 저연탄 불씨가 없어져야 하는데 좀처럼 사그러 들지를 않는다. 
할 수 없이 물을 부어 보기로 했다. 조금 부었더니' 칙' 소리가 나며 수증기가 확올라와 너무 놀랐다. 불이 내얼굴로 다가 오는것처럼 화끈했으며,불이 난줄 알았다.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너무 무섭고, 웃음도 난다. 

겨우 마무리를 하고 나니 기진 맥진하게 되었고, 고모도 오셨다.' 연탄은 갈었니?' '예' 하며 누워 있었다. '어디 아픈겨 왜 누워있어' 하신다. 좀전에 있었던 일은 말할 수 가 없었다. '그런것도 못해' 그런소리 를 들을까봐 하기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습기도 하고 몰라서 그랬는데 솔직하게 말했어야 하는데 생각도 든다. 그래도 그때가 사는 냄새가 나서 좋았다. 지금은 하나의 추억으로 얘기할 수 있지만 그때는 연탄 가는것이 무섭고 두려웠다.

그후로 사회생활 하면서 그때의 실습이 도움이 되어 거뜬히 연탄을 갈았던 기억도 난다. 결혼해서도 처음에는 연탄을 연료로 썼다. 아파트인데도 연탄 보일러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도 생각이 난다. 
결혼하고 신혼 여행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밥을 하게 되었다. 밥은 전기 밥솥이 한다고 하지만 반찬을 해야 되는데, 그때는 석유 풍로에 성냥으로 불을 켜서 반찬도 하고 밥도 했었다. 그런데 나는 불을 못붙여 머뭇거리는데, 남편이 연탄 보일러 뚜껑을 열고 그곳에서 반찬을 해준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고 소꿉놀이 하는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 같다. 처음으로 해준것이 계란 프라이 하고, 콩나물에 고추가루를 넣고 양념을 넣어 후라이팬에 볶아 만든 콩나물 찜이었다. 
난 그것도 할줄 몰랐었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지금도 그맛이 생각나서 가끔 해먹는다. '신혼때였기에 뭔들 좋지 않았겠어' 하며 웃어본다. 가끔 그런 얘기를 하며 '그때처럼 해줘봐' 하면 '그때니까 그렇게 했지'하며 웃음으로 대신한다. 

그때는 월급을 타면 한달 쓸 연탄을 제일 먼저 사놓고 생활을 했었다. 지금처럼 엘리베이터도 없고 고층이래야 5층이었다. 3층위로는 힘이 많이 든다 해서 연탄 값도 다르게 받았다. 연탄을 아끼려고 집안에서도 옷을 두껍게 입고 생활을 했다.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아끼는 것이 몸에 배여 있어 그런것은 예사였다.
요즘은 겨울에도 반소매에 반바지를 입고 생활하기에 그시절을 모르는 젊은 세대는 이해를 못할 수 도 있을것이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기에 시골에서의 겨울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를 알고 있다. 제일 먼저 가을 걷이를 한다음 땔감을 준비해야 한다. 
산골은 겨울도 일찍 찾아온다. 가을에도 낮에는 뜨겁고 덥지만 해만 넘어가면 춥다. 그래서 불을 지펴야 한다. 식구가 많고 방도 여러개라 땔감도 많이 필요하기에 힘이 없는 어린 동생들은 솔방울을 주워오거나 솔잎을 긁어 와야한다. 그리고 나는 솔가지를 잘라 와야했다. 

할머니께서 동생들 앞에서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시면 더잘할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다른 연료가 없었기에 나무가 부족하면 마르지 않은 소나무도 땔감으로 사용했다. 그것은 마르지 않았기에 잘못 불을 때면 연기로 집안을 가득채워 동생들은 맵다고 난리들이다. 
그런 불편은 일상 생활이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도 가족이 한지붕 밑에서 오손 도손 살았던 기억은 언제나 웃음짓게 하며 옛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 

이번 겨울에는 예날 생각하면서 옷을 정리하며, 겨울을 추억으로 저금 했던것 을 찾아 써보면 어떨까? 생각을 해보며, 옛날을 추억으로 행복한 겨울을 맞이 했으면 좋겠다.'그래 그때는 그랬지'하며 공감을 하는 모든 분들께 잠시라도 사는 맛이 물씬 풍기는 옛날로 잠시 돌아가 행복한 웃음 한번 크게 날려 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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