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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장, 빈수레처럼 살도록 노력해봐
영어에 불규칙 동사가 있는 이유를 깨달은 군대생활
2012-10-09 15:49:49최종 업데이트 : 2012-10-09 15:49:49 작성자 : 시민기자   유병화
날씨가 선선해 지니 은근히 기분이 센치멘탈 해지고, 어떤때는 혼자 있고 싶어지고 문득 옛 친구들도 생각나면서 그냥 그런 기분이 든다.
그리고 시간이 날때마다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게도 되고. 혹시나 인생살이 해 오면서 그동안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 준건 없는지, 나로 인해 불편했던 사람은 없었는지, 뭐 그런것들도 자꾸만 떠오른다.

유병장, 빈수레처럼 살도록 노력해봐 _1
사진은 작년 가을에 경상북도 청송 주산지에서 찍은 것입니다

나는 참 고집불통이었다. 순둥이라고 소문난 아이도 세 살이 되면 고집불통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유 없이 반항하고, 분노하는 행동은 아이 안에 자아가 생기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자신감이 생기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인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어떤 일이든 도전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게 좋게 발달하면 다행이지만 성장과정에서 엉뚱하게 가면 소위 골치아픈 지경에 이른다고 한다.

내가 그랬다.
어릴때부터 엄마가 보기엔 무리인데도 불구하고, 혼자 세수를 하거나 계절에 안 맞게 마음대로 웃을 고르는 일, 엄마가 도와주려고 하면 지나친 간섭이라고 생각하며 컸던듯 하다.
그 때문에 '보이는거 없던' 나는 유난히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했다. 
교복을 입고 다니며 선후배 위계질서가 무서웠던 70년대 중고등학교 시절은 물론 군대에 가서도 윗 사람들에게 대들다가 많이 맞았고 벌도 많이 섰다. 

결혼을 앞두고 지금의 아내를 소개 소개시켜 드리기 위해 시골에 내려갔을때 일이다.  인사를 마치고 서울로 오는 길이었는데 아내의 표정이 무척 어두웠다. 혹시나 내가 모르는 사이 부모님으로부터 안좋은 말을 들은건가 싶어 아내에게 물었으니 아니라고만 말할뿐 달리 속시원한 말이 없었다. 

그후 결혼한 뒤 설날 집에 갔다가 친정에 내려온 누님으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전해 들었다.
내가 어릴 때 박하사탕 나눠먹지 않고 혼자만 먹는다는 이유로 동네 친구와 싸우다가 그 친구의 눈을 작대기로 찍어 그 집안과는 아직도 앙숙처럼 지낸다며, 내 성깔이 보통이 넘으니 항상 조심하라고 형수님이 아내더러 '친절하게' 일러주었는다는 것이다. 결혼전 아내가 형수님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고 지레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누님이 내게 알려줬다.
물론 형수님은 그녀석이 먼저 박하사탕을 가지고 "용용 죽겠지"라며 놀려대고 동네 아이들 죄다 불러 놓은 후 박하사탕을 가지고 왕처럼 굴며 치사하게 행동했던 앞뒤 정황은 설명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결과만 놓고 보면 나는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약간 일방적인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게 아니란걸 깨달은 사건이 일어났다. 군대에서의 일이다.
 당시 무장공비가 침투했고 북으로 도주하는 적 잔당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전군 비상 경계태세 아래 우리 부대는 강원도 모 산악지대에서 매복을 하게 됐다.

칠흑 같은 어둠, 언제 무장간첩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분대원들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정도로 긴장된 순간이다. 병사들은 매복중 용변이 마려운것을 방지하기 위해 낮엔 가급적 물을 적게 마시고, 대변은 미리 해결해 둔다. 그렇잖아도 전날, 그 전날 계속해서 인접 참호에서 엄청난 교전 사격이 있었다. 그것이 들쥐든 오소리든 암흑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는 무장간첩으로 간주하고 사격하도록 돼 있었다. 

수류탄 밀봉을 뜯어 옆에 둔 참호속에서 삽탄한 소총을 들고 전방을 바라보며 새벽까지 초긴장... 전방 일제 사격 때는 총 소리보다 옆에서 소총을 난사하는 전우의 거친 호흡 소리가 더 클 정도로 두렵고 떨리는 매복, 교전, 매복의 연속..... 

어느날 나는 매복 방식을 두고 선임하사와 마찰을 빚었다. 군사 비밀이라 자세하게 말할수는 없지만 말년 병장이라 군대 좀 아는 내가 선임하사와 의견충돌이 생긴 것이다. 그때 내 생각엔 피아 식별이 안되는 껌껌한 밤에 자칫 참호끼리 교전이 벌어질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지만 그 일로 나는 작전이 끝난후 명령 불복종으로 영창을 갈뻔 했으나 제대를 앞두고 있어서 전출을 가는걸로 마무리지어졌다. 

전출 가던 날, 중대장님이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하셨는데 나는 그 따끔한 충고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유병장, 사람은 가끔 빈 수레처럼 살 필요가 있다. 짐을 잔뜩 실은 수레는 수렁에 빠지면 못나오지만, 빈 수레는 소리는 요란해도 수렁에는 빠지지 않거든. 더구나 빈 수레에는 앞으로 필요한 짐을 더 실을 수 있는 여백이 있지 않나? 영어의 단어에 규칙 동사만 있는게 아니잖아. 가끔 불규칙 동사도 있거든.  그게 우리 삶의 여유라는거야. 그게 인생이라! 사회에 나가거든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봐" 

설익은 자존심과 항상 내가 옳다는 생각만으로 살아오던 나는 인생의 중요한 새 출발점에서 진정 뼈저린 지적을 받은 것이다. 
여전히 각박하고 자기주장만 하는 세상이다.  스스로의 가슴을 비우고 이 가을,  '빈 수레의 여백'을 가슴에 안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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