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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공부, 야학을 하던 20년 전 그때
2012-09-17 14:48:03최종 업데이트 : 2012-09-17 14:48:03 작성자 : 시민기자   이기현

"가갸거겨, 우리나라 무궁화꽃, 아리랑 쓰리랑"

연필에 침을 묻혀 가며 정성 들여 공부하는 모습. 이건 유치원생 이야기가 아니다. 피할 수 없는 지난날의 가난을 짊어지고 태어난 안타까운 우리 어르신들이 뒤늦게라도 배우고 싶어 야학에 나와 글공부를 하는 소리다. 

버스도 제대로 탈 수 없고, 호적등본 떼러 가기도 무서워서 소리 없이 고민하던 어르신들. 그러나 이제는 군대 가 있는 아들에게 편지도 쓰고 싶어서, 초등학교 졸업장이라도 받고 싶어서, 그리고 글을 배워 운전면허를 따고 싶어서 글을 깨치고자 하시는 분들. 그분들의 야학 학습열은 정말 눈물겨울 정도다.

우리말 공부, 야학을 하던 20년 전 그때_1
우리말 공부, 야학을 하던 20년 전 그때_1

그러니까 시민기자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이니 벌써 20년 전이다.
그때 대학 수업을 마치고 시간을 내어 짬짬이 야학 강사를 했다. 같은 학과 친구가 소개를 시켜줘서 함께 나간 곳이 야학방이었다. 마땅히 이름도 없는 그저 동네 야학. 거기서 달동네 어르신들께 나는 한글을 가르쳐 드렸다. 2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참으로 뿌듯하고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야학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를 잊을 수 없다. 야학을 먼저 시작한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갔을 때 크게 복지센터건물이 보였다. 나는 당연히 그 건물이 어르신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야학 건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건 오판이었다.

그 뒤를 돌아가니 세 개의 코딱지만 한 컨테이너 박스 입구에 초등반, 중등반, 고등반이라는 팻말을 보고서야 야학이 어떤 건지 알게 됐다. 그리고 '여기서 수업을 하는 건가?' 라는 추측과 함께 '이런 곳에서 수업이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교실을 살짝 엿보면서 느낀 점은 배움에 장소는 중요치 않다는 점이었다.  10대~20대의 청소년들뿐만이 아니라 40대~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좁은 책상에 앉아 열심히 한글을 깨우치고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마저 느껴졌다. 

그곳에서 만난 장 선생님. 이미 2년 넘게 야학 강사를 하시던 그분은 직장인이었다. 
"요즘은 야학들도 잘 안 해요. 완전 무보수에 100% 봉사다 보니 힘든가 봐요. 그나마 있는 자원봉사자들도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가 버려요. 2~3개월 하다가 다시 안 나오는 경우도 있다 보니 야학 학생들의 공부과정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내가 처음 갔을 때 금세 그만둘까봐 염려스러웠는지, 미리 다짐을 받아두겠다는 듯... 좀 오래 같이 활동하자는 부탁을 하셨다. 

"그래서 야학에서는 머리가 좋고 가르치는 실력이 좋은 교사보다 좀 어수룩하지만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이 되면서 꾸준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함께 배워나갈 수 있는 진정한 교사가 더 필요하죠"

장 선생님의 말씀 덕분에 나는 군대에 갈 때까지 2년 반을 야학에 몸담게 됐다.
낮에는 생업에 쫓기다가 밤에 짬을 내어 오셨으니 우리 어르신 학생들은 피곤하고 졸음이 쏟아지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도 책상에 앉아 조금이라도 배우기 위해 어금니를 물어가며 졸음을 이겨내는 모습이 너무나 진지해서 강사가 대충 강의할  마음을 먹을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초급반을 맡았다. 강의실에 들어서자마 칠판 앞에서 열심히 가나다라를 쓰면서 수업을 하곤 했다. 우리 초급반에는 초중고 시절에나 봄직한 책걸상에 옹기종기 앉아서 10명 남짓한 학생들이 수업을 들었다. 그들 중 80% 이상은 40대 이상의 아저씨, 아주머니들로 강연하는 내 손짓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가끔씩 책을 보며 달력 또는 이면지로 만든 연습장에 열심히 가갸거겨를 쓰고 또 쓰곤 하셨다.

글을 아는 사람들에겐 별거 아닌 한글을 연습장에 자음 모음을 하나하나 써 가시면서 열심히 익히는 모습이 얼마나 진지하고 열정적 이였는지, 오히려 배우는 학생들 속에서 내 스스로가 무언가를 배워간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때론, 녹색 이면지에 '태극기' '물레방아'같은 단어를 쓰다가 잘 안되었는지 아이처럼 짜증을 내시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그럴 때는 영락없는 사춘기 중학생 같다.

"국민핵교 2학년 댕기는 손주 앞에서 한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있어야지 원. 그게 챙피해서 나왔지 뭐야. 언능 갈켜줘"
"할아버지(남편)한테 배우시지 그랬어요?"
"할방? 싫어. 그 영감태기 날보고 미련하다구 그래. 그거 챙피해서 싫어"
야학반에서 항상 맨 앞에 앉으시던 오 씨 할머니. 잠깐 쉬는 시간에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시며 풀썩 웃으셨던 분들.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그 서러움과 속상함을 이겨내며 늦깎이 배움을 이뤄낸 그곳, 그 끈끈한 이웃사촌 문화를 만들어낸 공간은 지금쯤 재개발로 인해 아파트촌으로 변했다고 들었다.

이제는 의무교육이 되어서 야학이 필요한 곳은 없을 듯하다. 그러나 내가 언젠가 현직에서 은퇴를 하면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 혹은 외국인 주부들을 위해 다시금 국어책을 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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