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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봉투를 풀로 붙여온 게 잘못이라고?
상대 입장에 서 보는것, 그게 배려의 출발
2012-08-28 00:30:52최종 업데이트 : 2012-08-28 00:30:52 작성자 : 시민기자   김성희
며칠전 옛 직장 부장님의 부친께서 작고하셔서 멀리 경기도 남양주로 문상을 갔었다. 
장례식장 문앞에 다가가니 당시에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이 와 있길래 그곳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영정이 모셔져 있는 빈소로 향했다.

고인께 절을 드린 후 상주와도 맞절을 하고 나서 자연스레 부의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 말고도 함께 빈소에서 절을 드린 옛 동료직원들도 마찬가지로 부의함쪽으로 왔는데 거기서 웃지 못할 일이 생겼다.
사실 좀 웃음이 나오는 일이었는데 장소가 장소인지라 대 놓고 웃을수 없어서 그냥 참느라 애(?) 먹었다.
문상객중 한명이 부의 봉투를 냈는데 봉투의 입을 풀로 붙였던 모양이다. 함께 봉투를 내던 다른 사람이 그걸 보고는 작은 소리로 "거길 풀로 붙인거야?"라고 물었고 그 당사자는 "응. 쑥스럽잖아"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응수 하는 것이었다.

부의 봉투를 풀로 붙여온 게 잘못이라고?_1
부의 봉투를 풀로 붙여온 게 잘못이라고?_1

순간 옆에 있던 다른 문상객들이 소리 안나게 '킥킥'대느라 약간의 소동이 있었고, 빈소를 떠나 문상객들이 다함께 모여 있는 대기실로 와서는 서로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박장대소 하거나 파안대소 한건 아니고, 소리없이 숨죽여 웃으며 부의 봉투든 결혼식 축의금 봉투든 봉투 주둥이를 풀로 붙이는 사람이 어딨냐며 배꼽을 잡았다.

그런데 사람들을 더 웃긴 일은 그 당사자가 "나는 다른 때도 꼭 붙여서 내는데?"라며 반문하는데서 모두 기절할뻔 했다.
그 말을 들은 문상객중 한명이 상가나 결혼식장에서 봉투를 낼때 민폐 아닌 민폐를 끼치는 대표적인 유형이라며 사례를 들어주었다.
생각할수록 구구절절 옳은, 참 공감 가는 말이었다.

그 말을 하는 요지는 조문이나 축하나 그 장소에 갈때의 작은 배려에 관한 얘기였는데 사소하지만 상대방 입장 좀 고려하자는 뜻이였다. 
첫째, 흰 A4지로 돈을 둘둘 말아 쓸데없이 종이 낭비하고 쓰레기를 만드는 사람, 둘째 풀로 붙여 뜯기 어렵게 하는 사람, 셋째 봉투 입구 삿갓을 굳이 접는 사람, 냇째 액수가 3만원 5만원이 아니라 4만원 9만원을 넣어서 봉투를 털어보게 하는 사람, 다섯째 어려운 한자 이름 휘갈겨 쓰는 사람.

모두 다 공감 가는 사례 아닌가. 실제로 나도 결혼식장에서는 하객의 봉투를 접수하던 사람이 누군가가 낸 봉투의 한자를 몰라 이사람 저사람에게 묻는 것을 본게 한두번 아니다. 정말 정자로 써도 요즘 사람들 한문 잘 모르는데 거의 난필 수준으로 휘갈겨 놓아서 결국 그걸 알아보지 못하면 그는 졸지에 그 결혼식장에 참석 안한꼴이 될수도 있는 일이다.

"가뜩이나 문상객 맞느라 무릎 저리고 슬퍼서 가슴 아린데, 기왕에 마음 전할라면 상주의 애로도 생각 해줘야 하잖아"라며 우스갯소리로 배려는 사람에 대한 작은 예의이면서도 모두를 만족시키는 가치라는 결론을 내었다. 
배려는 우리 사회 일상에서 너무나 흔하게 늘 마주치는 부분이며, 또한 그 형태가 아무리 작아도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게도 하는 힘이다. 

언젠가 '버스표 파는곳'이란 간판이 '버스표 사는 곳'으로 바뀐 것을 보고 '공무원들의 사고가 유연해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제도를 만드는 사람 중심에서 비로소 그것을 사용하는 소비자중심의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은 키 작은 승객을 위한 낮은 손잡이가 등장했고, 전철에서는 배 안 부른 임산부를 위한 별도 공간도 생겼다. 

이렇게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제도적 배려도 중요하지만 더욱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일상 속에서 사소하게 벌어지는 작은 배려의 현장일 것이다. 가끔 TV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단 몇 초간의 배려를 소개하는 공익광고를 볼 때마다 쉬운데 왜 나한테는 어렵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직장동료 간에 친구 간에 가족 간에 작은 배려는 자연스럽고 즐거운 것이어야 할 것이다. 

잘 알려진 일화가 있다. 앞을 못보는 사람이 밤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길을 걸었다. 그와 마주친 사람이 "정말 어리석군요. 당신은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닙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이 시각장애인은 "당신이 나와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요. 이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일화.

결국 배려는 선택이 아니라 공존의 원칙이란 확신이 든다. 
그래서 모든 배려는 상대 입장에 서 보는것, 그게 배려의 출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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