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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딸이 사온 아빠의 생일선물
2013-07-27 00:56:05최종 업데이트 : 2013-07-27 00:56:05 작성자 : 시민기자   문예진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깨무는 강도에 따라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 있지 않을까.

내게도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 있다. 딸 둘에 아들 하나, 막내아들 아이를 낳을 때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300점짜리 엄마라는 축하를 받으며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특별한 교육철학은 없었지만 대체로 아이들의 의견을 많이 들어주며 자유롭게 키운편이다.

아이들이 어렸을때는 일부러 아파트 1층에 살면서 위층에 사는 아이들보다는 규제를 덜 받았고, 그렇게 깔끔하지 못한 나의 성격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하루 종일 마음껏 집안을 어지르며 놀아도 잔소리하지 않는 엄마로 인해 나름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는 세 아이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엄마의 대접을 받았다. 큰 딸아이가 18개월 무렵,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다 큰 아이처럼, 나랑 말이 통할 것 같은 눈빛이어서 그때부터 학습지와 온갖 책들을 사서 아이를 고달프게 만들었다.

둘째 딸아이는 엄마의 극성이 조금 시들해져서 언니가 쓰던 교재를 이용해 생각나면 가끔씩 가르치는 정도였고, 셋째 아들아이는 그야말로 완전한 방목상태로 누나들이 쓰던 학습용 교재들을 여기저기 붙여만 놓고 혼자 알아서 배우겠지 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학교에 입학해서도, 큰아이 1학년때는 동생들을 놀이방에 맡기면서까지 학교임원을 했었고, 알림장 검사며 준비물, 숙제 등까지 아이는 엄마와 함께 학교를 다니는 듯했을 정도였는데, 둘째딸은 1학년 때만 잠깐 학교모임에 참석했었고, 아들아이는 입학만 시켜놓고 아예 무관심으로 지내는 엄마가 되어버렸다.

엄마의 극성만큼 상장을 받아오는 횟수도 세 아이가 달랐다. 1등은 당연히 큰딸 아이고 둘째딸아이도 간간히 받아오는데, 아들아이는 3학년때까지 한 번도 상장을 받아 온 적이 없었다. 그래도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의 배짱은 '그럴수도 있지 뭐'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엄마가 특별히 학교일에 관심을 쏟지 않아도 나름대로 선생님께 인정받고, 반장도 한번씩 하면서 잘 적응해가는 아이들 때문에 가끔씩 학교에 갈 일이 있을때면 선생님께 엄마인 나까지 어깨가 으쓱해질 정도로, 자랑스러운 아이들로 잘 자라주었다.

특히 둘째 딸아이는 또래들보다 키도 크고 목소리도 또랑또랑하니 커서 발표시간이면 선생님께 가장 많이 칭찬받고 여러 가지 학교행사에도 자주 뽑히며 친구들을 이끌어가는 능력도 뛰어나서, 반장과 전교어린이회 임원도 혼자 알아서 당선되고 활동하고, 그러면서 공부도 잘하는, 엄마에게는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고등학생 딸이 사온 아빠의 생일선물_1
둘째 딸아이의 유치원 다닐때의 모습


그런데 둘째아이가 중학교에 가면서부터 상황이 많이 변해버렸다. 큰딸아이는 여전히 모범생으로 엄마의 기대를 채워주고 있으며, 방목했던 아들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부터는 혼자 힘으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며 드디어 상장을 받아오기 시작하더니 다른 아이들보다 앞서나가는 아이로 나를 만족시켰다.

그런데 중학교에 입학한 둘째 아이는 엄마가 바라는 모범생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다.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딸아이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여러 가지 학교의 규제와 자꾸만 부딪혔던 것이다.

그때만해도 아직 두발 자율화가 되기전이라 짧고 단정한 머리를 원하는 학교규정에도 불구하고, 작은 핀 하나라도 꽂고 싶어 하는 아이는 선생님께 야단을 맞는 아이가 되었으며, 나도 모르게 줄여 입은 짧은 치마로 인해 나를 기겁하게 만들었고,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노는걸 더 좋아해서 나를 걱정시켰다. 거기에다 모범생언니로 인해 "언니랑은 많이 달라요" 라는 선생님들의 한마디까지 더해져 아이는 내게 큰 걱정거리가 되어버렸다.

학창시절 나의 모습은 선생님들이 원하던 모범생이었고, 큰딸도 내가 바라는대로 잘 커가는 중이라 둘째의 그런 모습과 행동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었던 나는 그때부터 식구들도 모르게 딸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붙잡고 타일러도 보고 눈물로 호소도 해보고 그래도 내 맘대로 되질 않자 방에 가두고 때리기도 해보았으나 한번 어긋나기 시작한 아이는 자꾸만 내가 원하는 모습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은 아이가 외모에 관심이 많아 꾸미는걸 좋아해서 그렇다며, 아이가 착하고 선생님들이 말씀하시면 잘 듣는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럼에도 내가 바라는 학생의 모습이 아닌 딸아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나는 아이를 올바르게 돌려놓겠다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부딪히며 아이를 힘들게 했다. 그러면서 학년이 올라감과 반비례해 성적은 뚝 뚝 떨어지고, 시험 감독으로 들어갔던 엄마들의 말에 의하면 시험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책상위에 엎드려 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도 전해들으며 중학생활을 보내고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해야 할 때가 됐는데, 도무지 어떻게 진학을 해야할지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인문계고등학교를 보내봐야 공부하고는 담 쌓고 살게 뻔하고, 실업계를 보내자니 엄마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고, 또 한가지 실업계를 가면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않아 일찍 끝날텐데 그 많은 시간을 아이가 무얼하고 다닐까 걱정하느니 차라리 꼴찌를 하더라도 인문계를 보내야 하나 하면서 별 생각을 다 하다가, 결국은 아이의 뜻대로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요즘은 실업계학교도 대학에 진학하는 아이들도 많아 본인이 원하면 대학입시 공부도 할 수 있고 졸업후 취업을 위해 여러 가지 자격증 준비도 열심히 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여유있는 시간 때문에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도 꽤 있다. 딸아이도 중학교 3학년때, 6개월을 졸라 결국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그 일을 쭉 하고 있다.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이니 벌써 3년째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을 때 가장 큰 걱정은, 아이가 학생으로서는 과한 돈을 벌게 되면 씀씀이가 커지고 돈을 우습게 알게 되어서, 돈 쓰는걸 쉽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받는 돈의 절반은 무조건 저금을 하고 나머지 절반만 쓰기로 약속을 했는데, 가끔 고가의 옷을 사고 싶을때를 제외하고는 잘 지켜가고 있는 편이다. 어린게 돈 번다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 힘들텐데도 한번도 힘들단 내색하지 않고 즐겁게 다니는 아이를 보면 그래도 끈기는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위로가 된다. 아이가 일하는 곳의 직원은 대부분 아르바이트 학생들이기 때문에 할만한가 보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그곳도 일하는 직장인만큼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는 것 같다.

여름이면 팥빙수를 찾는 손님들이 굉장히 많은데 한번은 캔을 따다가 손을 깊이 베어 온 날도 있었고, 손님들 중에는 어린 학생들에게 심하게 하는 분들도 가끔은 있다고 한다. 그동안은 엄마가 혹시라도 알바를 그만두라고 할까봐 말을 안한건지, 속이 깊어서 안한건지 그런저런 힘들단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난 정말 모르고 있었다.

고등학생 딸이 사온 아빠의 생일선물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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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딸이 사온 아빠의 생일선물_3
고등학생 딸이 사온 아빠의 생일선물_3

그렇게 엄마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돈을 벌고 있는 고등학생 둘째딸이 얼마전 아빠생일이라며 선물을 사왔는데 나도 선뜻 못 사는 고가의 옷을 두 벌이나 사온 것이다. 백화점에 갔다가 마침 세일을 하길래 두벌을 샀다는데,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해봐야 얼마나 받는다고 자신이 쓸 수 있는 절반의 돈에서 거금을 투자해 아빠선물을 사온 것이다. 기특하고 대견하면서도 마음이 아프다.

단지 공부를 못하고 부모가 바라는 대로 살아주지 않는다고 많은 걱정을 끼쳤던 아이였는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부모에게 일찍부터 효도를 하고 있는 딸이기도 하다. 아이 셋을 키우다 보니 교육비를 비롯해서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은데 실업계 고등학교이다 보니 등록금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고 본인이 원해서 하는 거지만 아르바이트로 자기 용돈은 벌어서 쓰니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딸아이에게 받고 있는 셈인 것이다.

아이가 기특하고 대견해서 사온 옷을 사진찍어 스마트폰에 올렸더니 남동생의 말이 "누나는 행복하겠네"라고 한다. 그런데 행복함보다는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했다. 아직도 엄마눈에는 어린아이인데, 그 어린 것이 돈 번다고 고생하는 것도 안쓰러운데 그렇게 번 돈으로 부모가 무언가를 받는다는게 아직은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것이다.

내게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었던 둘째딸아이. 비록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가는건 아니지만, 항상 당차고 야무지고 똑똑한 우리딸이 앞으로 어떤일을 하건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지금처럼 끈기있게 하면 비록 눈높이가 다르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사랑한다. 나의 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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