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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학 선생 '독도와 간도는 명백한 우리땅'
역사 전쟁의 외로운 선봉장 '사운 이종학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전시회
2012-08-15 18:19:54최종 업데이트 : 2012-08-15 18:19:54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이종학 선생 '독도와 간도는 명백한 우리땅'_1
사운 이종학 선생 동상

제67주년 광복절 아침, 전날 늦게 시작된 비가 잠시 그치는가싶더니 정오를 지나 이내 굵은 빗줄기로 변했다. 
사위는 온통 어둑어둑, 실내조명을 밝혀야만 전날 수원박물관에서 받아 온 책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지난 14일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 '사운 이종학,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의 개막식에 다녀와서 그간 알지 못했던 선생의 업적에 크게 감동받았다. 

그 영향 때문인지 집안에 있는 책들과 신문쪼가리들을 끄집어내며 간도와 독도 등의 역사에 집착했다. 수많은 애국·독립투사들이 한국근대사를 장식하며 우리와 함께했지만, 사운 이종학 선생은 영토주권과 민족정신으로 자존감을 높인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음에 내심 분개했다. 

2012년, 대한민국과 동북아시아 3국은 영토분쟁과 역사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은 심심하면 떠드는 학생처럼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중국은 '동북공정', 이른바 소수민족 통일화 정책의 일환으로 만리장성의 길이까지 늘리며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고 있다. 

역사의 인식은 역지사지로 생각해야함을 일깨우는 듯, 일본은 지금 중국과는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영유권 분쟁과 함께 자국의 북쪽 '쿠릴열도'는 러시아와 영토분쟁을 빚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0일, 우리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독도를 전격 방문함에 따라 '국제사법재판소(ICJ)'제소 등을 거론하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올해 11월 23일이면 사운 이종학 선생이 돌아가신지 10주기를 맞이한다. 이에 수원시에서는 죽어서도 우리역사와 영토의 수호신이 되고자 했던 선생의 뜻을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10월14일까지 수원박물관특별기획전에서 '사운 이종학,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을 준비했다. 
이에 시민기자는 이번 기획전을 계기로 수원을 넘어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사운 이종학 선생'에 초점을 맞춰 그의 생애를 살펴봤다. 참고자료는 '2012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 사운 이종학,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전시도록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힌다.

이종학 선생 '독도와 간도는 명백한 우리땅'_2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 개막식을 찾은 관람객들

사운(史芸) 이종학 그는 누구인가?

사운 이종학(1927~2002)은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주곡리 244번지(현. 화성시 우정읍)에서 태어났다. 화성시는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곳으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자라나 일본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는 역사연구자가 되었다.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어릴 적 서당을 다니면서 한학을 배운 후 삼괴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삼괴고등공민학교에 진학했다. 해방 직후 건국전문학교에서 법률 공부를 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곧바로 공군에 자원입대했다.

어릴 적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던 사운은 군 제대 후 서울 종로5가에 '권독서당'이라는 책방을 냈다. 이후, '연홍서림'으로 바꾸었다가 연세대 앞에 '연세서림'을 열면서 본격적인 고서수집에 달려들었다. 시간만 나면 인사동으로 달려갈 정도로 열정을 불사르니 서점 주인들이 좋은 고서가 나오면 제일 먼저 연락을 해 주었다. 

그의 인생 터닝 포인트는 교육가이자 수집가였던 길곡 서인달과의 만남이다. 사운의 정성에 감복한 길곡은 수집한 고서와 고문서 등의 사료를 모두 넘겨준다. 길곡 책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이충무공'사료에 빠지면서 충무공 연구에 몰두하고 이를 계기로 우리 영토 및 독도, 일제강점의 불법성에 대한 연구에 평생을 바친다. 

'역사의 김매기(史芸)'를 통해 역사전쟁에 맞서다

사운(史芸)은 그의 아호다. '역사가 천만년 누릴 정신의 옥토라면 지금 제대로 갈아주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잡초들을 솎아 역사가 제대로 자라게 하겠다는 의지로 '역사를 김매기'한다는 뜻으로 史芸이라 스스로 지었다. 
그는 2002년 11월, 76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일본의 한국침탈사와 독도 영유권, 이순신장군 관련 자료 등을 찾아 수집하고 알리는데 일생을 바쳤다. 

초창기 옛 사료들을 단순히 수집하던 사운은 이순신 장군의 연구를 하던 중 관련 자료들을 모으면서 장군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 전체가 일본에 의해 크게 왜곡 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힌다. 
'해장집'의 기사를 통해 거북선의 머리가 몸통으로 들락날락하는 구조였음을 밝히며 거북선에 대한 재 고증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또한, 장군이 왜군으로부터 항복받은 것을 기념해 세운 '수항루'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구한말사진까지 찾아내어 결국 복원까지 성사시켰다.

이후 사운은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독도와 한일강제병합의 과정에서 남의 땅이 되어버린 '간도'와 '녹둔도' 등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기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었다. 
일본의 역사왜곡문제는 국내에 존재하는 사료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일본 스스로가 만든 사료에서 그들의 모순을 찾고자 했다. 수시로 일본 길에 올랐다. 일본도서관과 고문헌 수집상을 찾아다니며 일제강점기와 독도 관련 사료들을 찾아 다녔다. 감정적 대응이 아닌 객관적인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종학 선생 '독도와 간도는 명백한 우리땅'_3
1905년 2월22일자로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한다는 시마네현 지사명의 고시문이다. 보통 신문에 게재하는 것이 원칙이나 당시 일본 관보나 신문에도 실린 증거를 찾지 못했다. 이는 독도 편입이 비밀리에 진행된 불법이었음을 반증하는 자료다.

국내외를 다니면서 모은 지도와 서적, 신문기사, 마이크로필름 등에 나타난 '조선해'와 '독도'와 관련된 사료들은 1997년 '독도박물관'에 기증하면서 독도박물관 개관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독도이외에도 1860년 북경조약으로 러시아에 속해 버린 '녹둔도'와 1909년 간도협약으로 중국 땅이 되어버린 '간도' 등 우리 땅, 우리 역사를 되찾기 위해 관련 자료들을 모으는데도 집념을 불살랐다. 

뿐만 아니라, 1910년 데라우치가 병합 추진과정을 기록한 비밀문서 '조선총독보고 한국병합시말'의 극비문서와 '한국병합에 관한 서류-착전과 발전', '추밀원 회의필기-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외'등의 문서를 공개하여 한일강제병합은 무효라며 만천하에 주장하고 이후, 자신의 개인비용으로 3개 국어로 번역하고 책으로 출판하여 국내외 관련 기관 및 연구자들에게 배포하여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렸다.

수원'화성'의 제 이름 찾기와 '사운연구소'

사운선생은 일제가 지어 사용하던 '수원성'이란 명칭을 본래의 제 이름을 찾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1996년 수원화성축성 200주년이 되던 해에 이를 기념하여 화성의 제 이름 찾기의 일환으로 '화성성역의궤'를 영인하여 보급하였다. 특히, 해제와 간행사를 영어로 번역 첨부하여 해외 한국학 연구기관에 무료로 기증하며 화성의 우수성을 알렸다. 

이는 당시, 화성축성 200주년을 기념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화성을 등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던 시기로 심사단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한몫했다. 심사단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수원화성을 원형으로 복원하는데 '화성성역의궤'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결국 1997년 12월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본래의 이름도 찾게 되었다. 이해 5월에, 자신이 수집한 자료와 연구 결과를 정리하고 책자발간을 위해 화서동에 사운연구소를 개소하였다. 동학관련자료 외에 수원화성 관련 자료집 발간 사업 등 동아시아 근대역사바로세우기에 기여했다.

평생 모은 자료 '수원시'에 기증

사운 이종학 선생은 사료를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장되지 않고 지속적인 연구'가 계속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사료의 성격에 따라 필요한 곳에 기증하여 관계기관에서 전시 및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일제강점기 사료들은 독립기념관에, 이순신 장군 자료는 현충사와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에, 독도 관련지도 외 서적은 독도박물관으로 기증하였다. 동학관련 자료는 천도교에 무상으로 전부 기증하고, 화성축성 200주년 되던 해에 '정조대왕 및 충효자료전'이란 특별전시를 개최한 후 400여점 모두 수원시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렇듯 아낌없는 사료 기증은 그의 사후, 고향 수원에서 역사와 문화를 연구 전시하기위해 건립 중이던 '수원박물관'에 2004년 고서, 고문서, 관습조사보고서, 사진엽서, 서화 등 2만 여점이 넘는 사료를 기증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뜻을 기려 2008년 10월1일 수원박물관 내에 '사운 이종학 사료관'이 개관했다.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위한 각종조사 사업들, 영토문제를 연구하며 수집한 지도류 등을 통해 당대의 역사와 영토인식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종학 선생 '독도와 간도는 명백한 우리땅'_4
한 관람객이 남긴 메시지가 감동적이다

사운 선생을 통해 본 우리의 역사인식은

.....조선 사람들은 밤낮 없이, 남녀노소 없이 봇도랑을 팠다. 물길이 될지, 무덤이 될지 아무튼 파는 길밖에 없었다...... (농군-이태준)
이 소설의 배경은 '만주'다. 주인공 창권은 가족과 함께 봉천행 보통열차를 타고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춘 장자워크에 안착한 후, 봇도랑을 째기 위한 사수를 벌인다. 봇물은 곧 생명수로 벼농사에 필수요건이었으니, 토민들과 순경이 들이미는 총부리에도 기어이 봇물을 터트린다.

이번 여름휴가를 맞아, 그리고 8년 전 휴가 때 이렇게 2번 만주에 갔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때 한없이 평화로웠던 녹둔도도 돌아보았다. 산하가 모두 우리 땅과 같은 모양새였다. 동료들과 함께 지난 역사를 뒤돌아보면서 안타까워했다. 
그곳에서 죽기 살기로 봇물을 파야했던 우리 조상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압록 강변에서는 이산된 채 반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북쪽의 사람들과 묵언의 대화를 해야 했다. 기획전을 보면서 만주와 녹둔도를 떠올렸다.

'독도는 우리 땅'임을 천명한 가운데 대형분쟁을 일으키기 위해 여러 가지 카드를 준비 중인 일본의 움직임을 사운 선생은 살아계셨다면 뭐라고 다그치셨을까. 임진왜란, 식민지배, 그리고 독도영유권 등 방대한 사료들을 통해 영토수호의식을 후손들에게 남기고자 했던 이종학 선생님, 그의 극진한 조국사랑은 우리민족에게 값진 선물로 남았다. 
국보급 사료들이 즐비한 전시실을 돌아보고, 자국의 영향력을 내세워 지금도 우리의 역사와 영토를 넘보는 주변국들에 대항해야 하는 우리들의 역사인식은 몇 점이나 될까. 광복절 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도록 귀중한 자료들을 모두 기증하신 부인 윤정의 여사와 유가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2012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
'사운 이종학,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2012.8.14(화)~ 10.14(일)
매월 첫째 주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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