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자전거에 얽힌 아름다운 추억
2012-08-08 15:19:43최종 업데이트 : 2012-08-08 15:19:43 작성자 : 시민기자   강석훈
펑크난 자전거를 수리하기 위해 자전거점에 갔더니 100~200만원짜리도 있었다. 내것은 겨우 15만원짜리였기에 주인더러 "이건 왜 이렇게 비싼거요?"하고 묻자 이런저런 기능을 설명해 줬다. 쇼바 기능까지 있어서 히프와 허리를 보호해 주는 것은 물론, 접이식에 골고루 기능들이 들어 있었다.
자전거집 주인 말로는 BMW자전거까지 나오는데 그건 가격이 500만원을 넘는다 한다.

 
자전거에 얽힌 아름다운 추억_1
자전거에 얽힌 아름다운 추억_1

참 세상은 요지경이다.
어린이시절 타보던 세발자전거에 대한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온 힘을 다하여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비틀거리며 달리던 일. 내가 어릴때는 가난해서 세발자전거 같은건 꿈도 못 꾸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지나 좀 성장하여서는 '지러렁 지러렁' 벨소리 울리는 어른용 일반 자전거를 접했다. 울퉁 불퉁한 학교 길을 달리며 등하교한 추억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적잖다. 

시골이나 도시에서도 조금 여유 있는 집에서 자란 사람들은 짐 운반수단인 일반자전거를 접할 수 있었고, 도시에서 자란 청소년에게는 로드형 (포장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싸이클이 인기가 있었으나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못되었다. 
시민기자가 중학교를 다니던 70년대만 해도 청바지 입고 싸이클을 끌고 길거리를 지나가면 그래도 있는 집 자식으로 취급했는데.. 그 이전에는 싸이클을 끌고 다닐 정도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특권층 자제로 대접되며 부와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요즘 청소년이 외제 수입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것 보다 더한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생각된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때 대전에 살던 동네 근처 한쪽은 그때 당시 부유층들이 살던 저택들로 채워져 있었던 곳이다. 어쩌면 그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층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동네가 아닌, 그 옆의 달동네에 살았다. 한쪽은 천당같고 한쪽은 완전 가난한 사람들의 집합소 같은 빈부격차가 컸던 동네였다. 그런 환경에서 살았기에 그 동네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는데 자전거에 대하여 나는 남다른 추억이 있다.

지금은 오토바이가 흔하지만 그땐 오토바이 대용으로 지금 오토바이 타이어 굵기의 거대한 바퀴를 단 짐 자전거를 탔다. 가난하게 살면서 아버지가 그 짐자전거로 사람들의 짐을 날라주며 품삯을 받던 직업이었는데 저녁때 돌아오시면 내가 그 자전거를 빌려 타고 학교에 야간자습을 하러 다니곤 했다.
자전거 자체가 워낙 크고 약간 '무식하게'  생겨서 우리 반 친구들이 날더러 '짐꾼' 이라거나 '짐자장구'라고 놀려대기도 했다. '자장구'란 그때 자전거를 일컫는 사투리같은 말이었다.

야간자습 다니던 도중, 짐칸에 가끔 친구를 태워 함께 다니곤 했는데 그 친구를 태우기 위해서는 부잣집들이 많이 사는 동네 골목길을 지나야만 했다.
그날도 야간자습을 위해 초저녁에 야식용 도시락을 싸 들고 친구를 태우기 위해 썩음썩음한 자전거를 타고 씽씽 달리고 있었는데 하얀 장미꽃과 붉은 장미꽃들이 이슬 먹은 체 환하게 곱게 피어 긴 담벽과 울타리와 대문을 장식하고 있던 골목의 어느 한 대문 앞에서 나는 하얀 옷을 곱게 차려 입은 천사같은 여고생을 보았다. 

맑고 청아한 피아노 소리가 장미꽃 넝쿨타고 들려오던 그 아침은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공간의 조화 속에 티 없이 순수한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이던  매력이 무언의 표현이었다. 더욱 가슴 설레게 한것은  여학생의 첫인상이었다. 백옥처럼 하얀 치아를 내보이며 미소를 머금은 매력이 내 얼굴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그 해맑은 아름다운 미소... 정말...

그날 이후 나는 태워달라는 말도 안한 친구를 꼬드겨 자전거를 태워주겠다는 명분을 스스로 만들면서까지 그 골목길로 다니는게 버릇이 됐다. 우연히라도 그 여고생을 보기 위해서. 10번 지나가면 2번 볼까말까한 희박한 확률에 기대를 걸면서 계속 그 골목길을 오갔다. 그리고 1주일에 한번꼴로 우연히 만나거나 마주치는(그쪽에선 내 존재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데도) 그녀를 보며 참으로 행복했다. 콧노래도 나오고 기분도 좋고 공부도 잘되고 가슴마저 설렜다.
이 이후에도 그녀는 내가 고교 2학년을 마치기까지 청초한 난향기 같은  모습으로  부드럽고 맑은 향기로 변하여 나를 기쁘게하는  바람으로 하늘을 채워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 앞에서 두 남학생이 경주용 사이클을 가지고 대문 앞에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그 집과 (그 여학생과) 어떤 사이인지는 모른다. 다만 소녀의 어머니는 그 집에 찾아온 남학생들에게 "어여 들어오거라"하며 안내를 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멀찍이서 다 썩은 짐 자전거를 끌고 그쪽으로 다가가던 나는 그 미끈하게 빠진 사이클 두 대를 보고는 기가 팍 죽어버렸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사이클의 강력한 포스 앞에 페달을 밟을때마다 기름칠이 덜된 체인쪽에서 '크렁~ 크렁~' 소리와 함께 녹슬은 티 팍팍 내는 짐자전거는 한마디로 쪽팔리고 만 것이다. 요즘말로 거의 멘붕이었다.

그 뒤로 그녀를 보기 위해 그쪽으로 가던 것을 포기하고 옆길로 돌아다녔다. 가난 때문에 일종의 자격지심이 생긴 것이다.
어린 마음에 생긴 가난의 상처는 컸다. 자격지심 때문에 이제는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을 닫았다. 그리고 크렁~ 크렁~ 소리를 내는 구닥다리 자전거를 그녀가 보는게 싫어서 아예 그 길을 피해 다녔다. 그길로 영영 발걸음을 끊은 것이다. 

그후 오늘 이순간까지 나는 그녀의 소식을 모른다. 아마도 지금쯤 나이 50을 먹은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있겠지만.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으며 이제 돌이켜 보면 자전거에 대한  그때의 일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