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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남의 땅, 간도에서 눈물흘리다
고구려 유적과 백두산 답사기(하)
2012-08-09 08:47:19최종 업데이트 : 2012-08-09 08:47:19 작성자 : 시민기자   김해자

답사의 첫날이나 진배없는 전날(30일), '5호분 5호묘'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 민족예술의 매력에 빠지고, 석조건축물의 조형미를 마음껏 발하는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비의 비문(1775자)을 통해 고구려의 원대함을 새삼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더불어 환도산성을 통해 보여 진 고구려 군사의 방어력과 공격력도 참 대단했을 것이란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기도 했다. 

오락가락 내리는 비를 맞으며 국내성 궁궐터로 추정되는 곳과 성벽을 찾아가 영역의 크기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남문과 인공해자 등 대부분 새로 개축된 티가 나지만 도성의 격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다만 도심의 아파트촌에 둘러싸인 형국이라 매우 안타까웠지만. 그러나 치(雉)와 성문 등 일부에서 전형적인 고구려산성의 축성기법 원형의 흔적이 드러나는 곳에선 탄성의 소리를 질렀다. 수원화성 성곽의 원류이었기에.

7월 31일, 백두산에 오르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 환인으로 이동하기 전 하루 온종일 백두산에 오르는 날이다. 전날 환도산성 답사 후 백두산 등정을 위해 통화로 이동했다. 아침 6시 45분, 개발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백두산 관광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서쪽루트, 서파 쪽으로 오르기 위해 부지런히 호텔을 나섰다. 

백두산은 함경남도· 함경북도와 중국 동북지방(滿洲)의 길림성이 접하는, 국경에 걸쳐있는 우리나라에서 최고 높은(2,744m) 산이다. 중국은 장백산(長白山)으로, 우리나라는 백두산으로 부르는데 공통점은 백(白), 즉 희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백두산 산정이 거의 사계절 백설로 덮여있고, 산정상부가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이루어져있어서 눈(雪)이 아니라도 희게 보이는데서 그 이름을 취했다 한다.(2012. 하계답사 화성연구회 자료집에서 발췌)

지금은 남의 땅, 간도에서 눈물흘리다_1
백두산 천지를 행해 1천442개 계단을 오르는 중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해 일찍이 한민족의 발상지로 또한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 늘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해온 민족의 영산이다. 
몇 해 전까지 해도 연길 쪽을 통해 주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이젠 중국에서 대내적으로 개발한 통화시의 서파로가 중심이 됐다. 연길은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사는 곳인데, 경제에 타격을 입지는 않았는지 내심 마음이 쓰였다.

침엽수와 자작나무 숲, 너른 야생화의 들판, 그리고 높고 낮은 구릉이 서로 뽐내는 동안 우리를 태운 버스는 구불구불한 길을 헤치며 올라갔다. 어언 1시간 정도 달렸을까, 백두산의 높이와 자태를 본격적으로 내보이지는 않았지만 전초전처럼 수려한 풍광은 드러나고 있었다. 흔들리는 차안에서 카메라 셔터를 연속 눌렀지만 부질없음을 나중에야 깨닫는다. 중간부터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풍광에 비한다면 너무나 미약하다는 것을. 

버스는 딱 중간에서 멈췄다. 이제부터 옷차림 단단히 하고 계단 1,442개를 올라가야 천지와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저 아래 출발지와는 완전 다른 날씨다. "어휴 추워"소리가 툭 튀어 나온다. 이때까지만 해도 백두산 정상의 온도도 이정도이겠지 생각하면 백전백패다. 
정말 얼어 죽을 것 같은 한파수준이다. 가을 등산복속에 긴팔 옷을 입었지만 센 바람과 영하의 온도는 마구 온몸을 떨게 했다. 그래도 거기까지 갔으니 꼭 천지는 보고가야 한다는 의지가 불타올라 끝까지 버텼다.

나무 데크와 돌계단이 서로 교차되면서 사람들을 맞이했다. 한 계단 한 계단 발을 디디며 합장을 했다. 남북한 통일을 염원하고, 가족의 평화를 기원하고, 세상 사람들의 행복을 빌면서 숨을 고르며 천천히 올라갔다. 상서로운 구름은 발밑에 깔리고 차갑고 맑은 공기는 영혼을 정화시켜 줬다. 한민족이라면 왜 백두산에 올라야 하는지 저절로 깨우치게 만든다.

오르는 지층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후는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제발 천지를 열어 달라고 염원하면서 정상을 향해 걸었다. '헉헉'대면서 도착한 백두산은 1미터 앞도 구분이 어려웠고, 서있기도 힘들 정도의 바람은 온몸을 얼게 했다. 
서기어린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렸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20여분이 지날 무렵 조금씩 서광이 비치더니 찰나에 천지를 보여주곤 다시 덮어 버린다.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떠나갈 듯 환호했다. 그 장관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때의 기분을 알지 못한다. 세상의 중심에 서있는 기분이랄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지금은 남의 땅, 간도에서 눈물흘리다_2
드디어 천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천지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올라갈 때의 힘듦은 완전 사라지고 내려오는 발걸음은 마냥 가벼웠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백두산의 2/3는 북한 땅이고 1/3만 중국 땅이라는데, 우리 땅 우리 산하를 중국을 통해야만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8월 1일, 다시 고구려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 환인으로 향했다. 비류수(혼강)의 물줄기를 품고 있는 환인지역은 고주몽의 건국신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외세의 항전을 위해, 내적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아래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옮기기 전까지의 졸본, 즉 환인은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사위가 되어 고구려를 세운 곳이다. 

고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하여 첫도읍지로 삼은 오녀산성은 깎아지른 절벽에 사방이 병풍 같은 지형이다. 정상으로 가는 길 중간 촘촘히 쌓은 성곽까지 오녀산성은 자연지세와 함께 완전 난공불락 요새다. 이곳도 백두산 등정처럼 반 정도는 버스로 오르고 나머지는 도보로 올라야 했다. 
이곳 정상에서도 천지(天池)를 보려던 때와 똑같은 상황이 연출됐다. 함께한 이들과 댐 건설로 인해 풍부한 강물로 장관을 이루는 환인시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잠시 후, 천우신조인지 신비감이 도는 기운이 서리더니 단숨에 운무는 걷히고 수려한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두들 '감동! 감동!'이라며 외쳤다.

지금은 남의 땅, 간도에서 눈물흘리다_3
오녀산성 남문, 협곡을 통과해서 내려 가는 중

또한 관망대를 거쳐 남문으로 내려오는 협곡 길과 철 계단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위험해 보이지만 자연경관의 아름다움 때문에 잠시 잊게 만든다. 오녀산성의 백미 코스다. 
한동안 넋을 잃고 빠져있는데, 함께한 동료가 나의 마음과는 달리 무서워하는 것으로 착각, "가방 들어 줄까요"한다. 그게 아닌데... 함께 주변을 탐닉하며 천천히 하산했다. 여행의 마지막 밤인 만큼 단동으로 이동 후 지인들과 현지의 밤 문화 탐색에 들어갔다. 야시장에서 현지인들이 먹는 대로 똑같은 음식들을 시켜놓고 행복한 밤을 맞이했다.

8월 2일, 신의주를 바라보며 눈물짓다

압록강구 교통의 기준이 된다는 '박작성'은 호산산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압록강 초입의 고구려 산성으로 현재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중국이 만리장성의 시발점이라 우기는 곳이다. 고구려의 옛 땅을 갈라놓은 국경선 압록강변으로 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북한 땅 신의주는 꽤나 가까웠다. 
부두에 덩치가 큰 화물선, 관광선 등이 보이고 북한 사람들이 자유로이 운동하는 모습, 분주히 일하는 모습 등이 선명하게 보였다. 같은 말을 쓰는, 불과 6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왕래하는 한민족이었는데.... 이제는 오갈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저기 있다고 생각하니 슬픔이 몰려왔다.

첫날 기상악화로 미뤘던 압록강 유람이다. 며칠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고려 말 요동정벌을 앞두고 이성계가 말머리를 돌린 위화도 회군의 장소와 일본군이 만주 점령시에 세웠던 철교가 한국전쟁 발발 후 미국의 폭격으로 끊어진 단교도 봤다. 
그리고 단동에서 바라보는 북한 신의주의 풍경도 일별했다. 역사적인 현장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며 발전된 단동과 확연히 차이나는 신의주를 한참이나 바라봐야 했다.

지금은 남의 땅, 간도에서 눈물흘리다_4
압록강 단교. 한국전쟁 폭격으로 단절된 채 그대로 서있다

다시 출국을 위해 대련으로 이동했다. 북방의 홍콩으로 불리는 대련은 청나라 말기부터 개발이 시작되어 동북아시아 경제·금융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개혁·개방이후 관광도시로 부각된 도시 중 하나다. 제일먼저 러시아가 들어온 만큼 러시아거리, 성애광장 등 볼거리도 풍부하다. 공항으로 이동전 곳곳을 돌아보며 4박 5일간의 답사를 갈무리했다.

답사를 마치며

2004년 고구려 첫 답사 때를 떠올렸다. 당시엔 도로며 숙박시설, 공공시설, 음식 등이 형편없어 5박6일 동안 무척이나 고생했던 기억이 각인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열악했다. 
다시 8년이 지난 2012년, 고속도로엔 개성 있는 휴게소가 들어서 있었고 불결하기 짝이 없던 화장실은 깨끗이 단장됐다. 
장거리 관광지를 찾아갈 때마다 아예 화장실이 없어 노상방뇨하며 곤혹스러웠었는데, 중간 중간 간이화장실도 세워지고 음식도 정갈해져 여행의 불편함을 덜었다. 

자연그대로 유적지만 남아있었는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함이었는지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로 정리·정돈 되었다. 
하긴, 역사적 기록도 통째로 변질시키는 마당에 하드웨어 고치기는 쉬울 터지만 우리 땅 우리역사를 그들의 입맛대로 왜곡시킨 흔적에선 대한민국의 한사람으로서 열불 나게 했다. 
이 땅을 회복하는 길은 없을까. 배려와 양보로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꿈을 꾸어본다. 머지않아 북한을 통과해 백두산에 오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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