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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뚝뚝 '겡상도 사내'의 아내 사랑법
2012-07-26 08:36:58최종 업데이트 : 2012-07-26 08:36:58 작성자 : 시민기자   임정화

결혼 기념일이 슬슬 다가 온다. 할 이야기 참 많다.
처음 연애할때부터 참 무드 없고 분위기 모르는 무뚝뚝 '겡상도 싸나이' 우리 남편. 결혼 전 프로포즈도 어느날 갑자기 으슥한 밤 골목길에서 내 손을 꽉 잡으며 "희야, 우리 매일 아침밥 같이 묵자"이거였다.

남들은 체육관 빌려서 프로포즈 하네, 야구장 전광판을 빌리네 하면서 멋들어진 프로포즈를 한다는 경악할(?) 뉴스들이 속속 귀에 꽂히는 판에 이렇게 무드 없는 남자는 첨 봤다. 어쨌거나 그것도 팔자라고... 이 남정네와 여태 산다. 애 낳고.

그런데 이 무뚝뚝 무드 없는 성격은 결혼 전이나 결혼 후나 '개과천선'의 기미기 안보인다.
예를 들어 부부가 살아가면서 챙겨야 할 최소한의 기념일이 그렇다. 장모님과 장인어른 생신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마누라 생일, 결혼기념일 정도는 기억해줘야 하는거 아니냔 말이다.

그러나 이 남편은 여전히 무뚝뚝이다. 거기다가 남편만 그러면 좀 낫겠는데 어찌 아이들까지 그 성격만 꼭 빼다 닮았는지. 아이들이 사근사근하지도 않고 애교도 별로 없다. 남의 집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별천지 같다.

생일 선물이 좋네 나쁘네, 생일 아침상이 성의가 있네 없네, 며느리한테 불만을 쏟아내는 어르신들을 TV에서 너무 많이 봐온 탓일까. 아니면 나 역시 집안 어른들 생신 준비에 부담을 느낀 적이 적지 않아서일까. 언제부턴가 내가 무슨 별스럽게 잘난 사람이라고 생일 타령을 하나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남편에게서 거의 기대할게 없으니 내 손으로 미역국 끓여 먹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루쯤 식구들 밥 하는 일에서 해방시켜주는 것만으로도 큰 선물이라고 말해오던 터였다.
결국 쌓이는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내가 생각해낸 묘안은 식탁의 탁상용 달력에 빨간 펜으로 대문짝 만하게 '내 생일'그리고 '결혼 기념일'이라고 표시해 놓기로 했다.  적어도 그 기념일이 있는 한달동안은 매일 쳐다보게 되니 그 당일날 까먹지 않고 남의 집 담장 너머에 있는 장미 꽃 한송이라도 꺾어 오겠지. 
 

무뚝뚝 '겡상도 사내'의 아내 사랑법_1
무뚝뚝 '겡상도 사내'의 아내 사랑법_1

새해 달력을 받으면 제일 먼저 이 두 기념일에 갖가지 색깔의 형광펜으로 표시를 하고, 다른 식구들이 행여 잊을세라 늘 상기시켜주며 손꼽아 기다리는 나를 아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달력표시 첫 해였던 일이다.
 전날 밤 야근을 마치고 밤 늦게 들어와 이내 쓰러져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을 보는 순간 나는 '올해도 틀려 먹었구나'하며 체념했다.

출근한 남편 뒤를 이어, 아침 식탁에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밥 몇 숟갈을 뜬 큰 아이 역시 가방을 집어들고 부리나케 현관문을 빠져나간다.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사라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베란다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면서 입속말을 했다. 
'저게 지 아빠 닮아서 무뚝뚝하기는 똑같단 말야. 에고 내가 뭘 더 바라겠어....'
그날은 우리 부부 결혼기념일 이었다. 

아침에 뿔뿔이 흩어진 네 식구가 다시 만난 것은 모두 다 귀가한 저녁때.. 
엇? 그런데.... 놀랠 노자다. 아무리 선물도 외식도 꽃도 필요 없고, 그저 말 한마디라도 "우리 결혼 기념일이네, 당신 만난게 내 인생에 가장 큰 축복이야"라는 돈 한푼 안 드는 말 한마디도 못해주나 라는 속상함이 왼종일 부글부글 끓고 있던 차에...

작은아이가 하얀 안개꽃 한 다발을 사온게 아닌가. 왔고, 남편은 케이크 대신 내가 좋아하는 수수팥떡을 사들고 온게 아닌가. 이틀전에 떡집에 맡겨 놨다는 말까지 하면서 겸연쩍게 웃는 남편. 이게 웬 시츄에이션?
떡에 초를 꽂고 뽀뽀와 덕담 한 마디씩. 
그때 남편이 큼직큼직하고 투박한 글씨가 가득 적힌 편지지 한 장을 내민다. 선물로 편지를 썼나보다 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우리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남편 직장 같은 사무실 직원들의 롤링 페이퍼였다. 

이런것까지? 남편이?
롤링 페이퍼는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돌아가며 적어주는 것으로 아이들이 캠프에 가거나 하면 친구들과 가끔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이들도 아닌 남편이 결혼기념일날 사무실 직원들에게 이런걸 받아 오다니. 

"형수님 결혼기념일 축하드려요. 건강 조심하세요"부터 "무드 없는 겡상도 싸나이와 사느라 힘드시지예? 고생 많심더 ㅎㅎ"등등.
이런 롤링 페이퍼를 준비할 만큼 남편에게 센스가 있었다니. 

촛불 앞에 선 남편이 내 손을 잡으며 한마디 한다.
"나랑 살아줘서 고마워"
이 이상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몇 년전, 탁상용 달력의 덕을 톡톡히 본 그날 이후 우리집 기념일은 늘 해피 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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