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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재래시장에서 추억의 향기 맡으며
시장에서 옛 기억을 되살리는 하루를 보내는건 어떨까요?
2012-07-27 10:54:08최종 업데이트 : 2012-07-27 10:54:08 작성자 : 시민기자   이연자

수원으로 귀향한지 몇 해가 지났다. 수원은 아이들 초등학교 전까지 따뜻한 추억을 많이 만들었던 제2의 고향이다.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서울에 살면서도 수원에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수원에서 살았던 기간보다 서울에서 지낸 시간이 더 길고, 그렇다 보니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거나 일을 보러가는 곳이 대부분 서울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수원은 포근한 향기를 느끼게 해준다. 

시간적 여유가 생겨 자신이 다녔던 유치원과 살던 동네를 가보자고 제안을 해왔다. 
딸이 다닌 유치원은 외관만 조금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큰 아이와 연년생이라 함께 유치원을 다녔는데 선생님들이 워낙 따뜻하고 책임의식이 강한 분들로 기억난다. 

우리아이들에게 유독 관심도 많이 가져 주셔서 유치원을 졸업하고도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지내실지 궁금하다. 내친김에 유치원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딸을 말리느라 고생했다. 다시 유치원을 다니던 그 때로 돌아간 것처럼 신나서 당시의 추억을 늘어놓는 모습이 아이 같다. 

점심때가 되어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는데 딸이 팔달문을 가자고 한다. 딸에게는 수원하면 '남문시장'이 떠오르나 보다. 우리가 수원에 살 당시만 해도 남문시장은 번화가 중 한 곳이었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고, 젊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상권이 많이 쇠약해졌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극장은 이미 문을 닫았고, 여전히 찾는 사람들은 많지만 예전의 생기와 화려함은 사라진 것이 안타깝다. 
마트에 익숙한 딸에게 재래시장을 보여줘야 겠다는 생각에 데리고 갔다. 시장입구마다 시장의 이름을 현대적인 글꼴로 간판을 달아 놓았다. 그리고 시장을 찾는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시장입구부터 끝까지 아치형 지붕으로 볕이 뜨거운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장을 볼 수 있게 설치 해놓았다. 

수원 재래시장에서 추억의 향기 맡으며_1
마트에서 느낄 수 없는 재래시장의 삶의 열정

그래도 여전히 재래시장의 왁자지껄함과 구수함은 느낄 수 있었다.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새로운 먹거리의 향이 코를 자극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시장 상인들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딸은 새로운 세계라도 만난 냥 여기 저기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재미난 것을 보았을 때 짓는 환한 표정이 드리워진 걸 보면 재래시장 나들이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있겠구나 싶다. 

지동시장, 못골시장 등을 둘러보고 시장에서 맛 볼 수 있는 비빔메밀국수를 먹었다.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정말 맛있다고 다음에 또 오자고 하는 딸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수원 재래시장에서 추억의 향기 맡으며_2
한 그릇 뚝딱한 비빔 메밀 국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쁜 간판을 보고 딸아이가 그 곳으로 향한다. 뜨개질실을 파는 곳이었는데 간판이 참 예뻤다. 뜨개방에 들어가니 나이가 지극한 할머니들께서 옹기종기 앉아 무언가를 하나씩 뜨고 계셨다. 

그 모습이 나의 어린시절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옛날에는 농한기가 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작은 방에 함께 모여 자식들의 옷을 떴다. 누구는 고구마를 삶아 오고 누구는 김치도 가지고 오고 간단한 음식거리를 준비해서 먹어가며 이야기를 하며 뜨개질을 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힘들었던 그 시대는 돈을 아끼기 위해 아버지의 헌 스웨터를 풀어 자식들의 옷을 뜨기도 하고, 정성스레 뜬 조끼를 어느 양장점에서 산 것보다 더욱 소중히 여겼다.

수원에서 아이들을 키울 때는 나도 곧잘 뜨개질을 해서 입혔다. 남매지만 동일한 색상으로 똑같이 떠서 입히고 나가면 사람들이 쌍둥이처럼 보기도 했다. 딸애가 워낙 사내아이 같아 머리도 자기 오빠처럼 잘라달라고 했고 옷도 항상 똑같이 입고 싶어 했다. 

지금은 본인의 어린시절 사진을 보면 예쁜 공주풍 원피스에 머리도 길게 길러서 묶어주지 그랬냐고 투덜거린다. 아이들이 다 크고 세월도 많이 흐르다 보니 내가 떠 준 스웨터를 입고 나란히 앉아 찍은 그 사진 속 그 때가 그립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아이들 옷 뿐만 아니라 남편의 옷도 여러벌 떠 주었던 기억이 난다. 나 뿐만 아니라 그 때는 연애시절에 대부분의 여자들이 목도리나 스웨터등을 손수 떠서 선물하는 게 유행이었다. 그리고 그걸 받는 사람들은 눈앞에 그 물건보다는 만든 사람의 정성을 더 큰 선물로 받아들였다. 

남편도 연애시절 내가 떠 중 조끼를 정말 잘 입고 다녔다. 당시 남자들이 와이셔츠 위에 조끼를 입는 것이 유행이라고는 했지만 역시 지금의 눈으로 보면 촌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80년대 남자들의 전형적인 헤어스타일에 굳은 표정으로 와이셔츠위에 조끼를 걸치고 찍은 남편의 사진을 보면 촌스럽지만 순수했던 그 때에 정감을 느낀다. 

요즘은 선물하면 값어치가 나가고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들을 선호한다. 명품에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의 지나친 소비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 때는 값어치보다는 정성, 작아도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을 선물하고 또 그것을 몇 십 년 동안 소중히 간직하는 분위기가 사회전반에 만연했다. 유행이라는 것은 10년마다 되돌아온다고 하던데 마음을 주고받는 선물을 하는 문화도 다시 돌아오길 바란다.

한 참 구경하던 딸이 머리띠를 하나 떠 달라고 하기에 뜨개질을 안 한지 너무 오래 되서 조금은 귀찮기도 자신이 없기도 했지만 내가 떠준 머리띠를 하고 행복을 느낄 딸을 생각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실을 사가지고 집으로 오자마자 뜨개방에서 복사해 온 도안을 펴고 뜨개질을 시작했다. 

우리 때는 도안을 보고 하기보다는 물어물어 누군가에게 배워가며 떴기 때문에 도안을 이해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딸이 도안을 해석하고 나는 예전 기억을 되살려가면서 코바늘뜨기를 했다. 앞에 앉아 어떻게 그렇게 빨리 뜨냐며 조잘대던 딸이 자신도 해보겠다고 한다. 손을 많이 쓰면 치매 예방에도 좋고 어린 아이들의 두뇌 발달에도 좋다면서 자신도 손뜨개질을 하면 지금보다는 머리가 더 좋아지지 않겠냐면서. 

수원 재래시장에서 추억의 향기 맡으며_3
보기만 해도 푸근한 실뭉치

수원 재래시장에서 추억의 향기 맡으며_4
완성된 딸의 헤어밴드

한 코를 뜨는데도 손을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하며 집중하고 뜨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처음 어머니에게 뜨개질을 배웠을 때가 어렴풋이 생각난다. 시작하는데 조금 애를 먹었지만 막상 뜨기 시작하니 금세 딸의 머리띠를 완성 할 수 있었다. 이 머리띠를 할 때마다 포근한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선물의 진정한 의미가 뭔가를 생각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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