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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만해 한용운
성북동 문학기행(2)
2012-07-19 13:55:15최종 업데이트 : 2012-07-19 13:55:15 작성자 : 시민기자   심춘자

최순우 옛집에서 만난 일산에서 온 독서토론 모임 회원들과 손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성북동 맛집으로 등록 된 이 곳은 맛과 가격이 화성박물관 옆에 있는 대왕칼국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마침 화성 탐방 계획도 있다해서 수원에 대한 자랑을 늘어 놓았더니 그 때 길잡이를 부탁한단다. 쾌히 승낙을 하고 다음 목적지인 심우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성곽을 왼쪽으로 끼고
또 십여분 오르니 잘 정돈 된 나무계단으로  심우장 입구가 보인다. 심우장을 가는 길입구는 나무계단으로 잘 정비가 되어 있었지만 주택가 올라가는 경사진 길은 빗물에 패인 바닥이 울퉁불퉁 골이 파여 있었다. 겨울에는 연탄재가 없으면 절대로 왕래를 할 수 없을 만큼 가파른 길을 끝없이 올라갔다. 좁은 길가에 마을과 어울리지 않은 오래 된 소나무가 보인다. 

심울장이라고 쓰여진 철문이 보인다. 성북동 여행코스인지 관리인은 보이지 않고 스탬프는 알아서 찍어가라는 메모가 적혀있다.  대문은 닫혀있고 옆에 작은 문으로 들어가니 문 앞에 허름한 양옥이 떡 버티고 서 있다. 
예전 한용운 선생의 따님이 심우장을
관리하면서 기거하던 곳이라고 한다.  한용운 선생이 기거하던 심우장은 들어가면서 왼쪽에 있는 근대 한옥이었다.  조선총독부가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는 일화가 있기도 하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만해 한용운_1
만해 한용운님 옛집 심우장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만해 한용운_2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만해 한용운_2

만해 한용운 선생은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 준비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3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과 개요'를 집필, 그의 독립사상을 표현했었다. 
그리고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여 그 사상적 깊이와 예술적 차원의 높이로  한국 현대시상 가장 빛나는 시인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심우장의 살림살이는 단출했다  쪽마루을 두고 중앙에 있는 방에는 선생의 유품과 글이 전시 되어 있다. '마저절위' 끊임 없이 정진하라는 선생의 친필 액자도 있다.  
선생의 영정이 있는 방에 앉아 밖을 보니 가깝게는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하늘 높이 서 있는 것이 보이고, 멀리 잘 정비 된  성북동 주택가가 시원스럽게 한 눈에 들오온다.  선생은 이곳에서 1933부터 중풍으로 돌아가실 때 1944년까지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심우장을 나와서 다시 좀
경사지고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갔다.  어느 블로그에서 근사하게 보았던 비둘기 공원이 생각이 나서 올라갔던 것인데 막다른 곳까지 올라갔는데 공원은 없고 가로 지르는 도로 벽에  칠이 벗겨지는 비둘기 그림만 있다. 다시 되짚어 내려갔다.  

굴다리를 지나  옆으로 시민들의 쉼터라고 볼 수 없이 노후하고 휴식처로서의 기능은 오래전에 다한 것 같은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김광섭 선생이 노래했던 '성북동 비둘기'는  벽에 있는 조형물만 남아 있었다.
   '성북동 비둘기'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자연 생태계와 인간의 순박성이 점차 상실되어 가고 있는 세태에 대해 경종을 울려 주는 작품이다. 순박한 인간성, 평화의 사상까지 파괴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어떠할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만해 한용운_3
이산 김광섭님이 노래한 성북동 비둘기

만해 한용운 선생의 명성에 많이 못미치는 미흡한 관리가 안타까웠던  심우장과 김광섭 선생이 노래 했던 성북동 비둘기는 그 때 모두 떠나고 이젠 흔적도 찾기 조차 힘들었다. 주변 환경도 오래 되어 맞은 편에 보이는 성북동 고급 주택들과는 판이하게  달라 '성북동에 이런 곳이...'고정관념을 깨는 곳이었다. 

숨이 차게 올라왔던 좁은 길을 다시 내려갔다.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인 수연산방이다. 
수연산방은  상허 이태준 선생의 옛집이다. '운문에 정지용. 산문에 이태준'이라고 할 정도로 최고의 문장가였던 선생은 이곳에서 '무서록','왕자호동', '달밤' 등을 집필하였다. 
지금은 외종손녀가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가옥이라기  보다
예쁜 별장 같은 느낌이 첫인상이었다. 내가 이곳을 알게 된 것은 선생의 '성'이란 짧은 수필을 접하면서 였고 꼭 와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선생은 매일 아침  칫솔질을 하다 바라보게 되는 성곽을 빤히 들여다 보면 이를 닦는 것인지 성곽을 닦는지 착각에 빠진다고 하였다.  하지만 조광보다 역시 저녁 해지는 석양이  더 아름답다고 하였다.  누마루가 있는 전망 좋은 곳에서 차를 마실 수 있다는 기대로 갔지만 이미 와 있는 손님들이 많아서 대청마루에서 선생이 느꼈을 문심을 느껴보았다.  성곽은 앞 건물과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어디쯤엔가 매일 선생이 보았을 성곽을 느낄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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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허 이태준님 옛집 수연산방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처음으로 가게 되는 곳이 이곳 성북동이 아닌가 한다. 오늘은 가지 못했지만 잘 생긴 백석 선생과 김자야 선생의 아름다운 사랑이 녹아있는 대원각. 김영현(=김자야)선생과 법정 스님의 크고 큰 베품을 배울 수 있는 길상사. 
하루 동안 다니기에는 조금 벅찬 성북동 문학 기행이었지만 유년시절  문학소녀의 마음을 다시 점검 할 수 있는 뜻 깊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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